금색의 코르다, 오오사키 시노부 × 히노 카호코
2009.01.05 작성.
전 신파를 좋아합니다. 그리고 슬슬 왜 이 귀찮은 짓을 시작했을까 싶고요.
답답함에 잠에서 깨어보니 온 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옷을 흥건히 적신 땀은 좌석에까지 배어있었다.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것은 땀 때문만은 아니었다. 잠을 잘 때마저도 자신을 괴롭히는 영상 때문이었다. 신기하다고 해야 할지 이상하다고 해야 할지, 다른 사람들에게 전화로 전해들은 사건인데도 그것은 선명한 이미지가 되어 무한적으로 머릿속에서 반복 재생되었다. 그 이미지는 하루 종일 괴롭혀 왔다.
연인
W. 소담(@kimiga_iru)
아직 비행기가 일본에 도착하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남았다. 다시 잠을 청할까도 생각해보았지만, 다시 잠 들어봤자 분명 꿈속에서 재생될 사건의 영상을 생각하니 그럴 마음이 들지 않았다. 더 이상 보고 싶지 않은데, 영상 속 그녀의 비명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돌아서 괴로웠다. 병원의 침대에 누워있을 그녀를 생각하니 눈앞이 뿌옇게 되어버려서 안경을 벗고 눈가를 문지르려 했지만 손과 발이 후들거려서 그럴 수가 없었다.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신 나간 놈이라고 하겠지만 그렇게 보여도 상관없다. 아니, 오히려 세상 모두가 나를 비난해야 마땅하다. 어째서 나는 이렇게 그녀와 멀리 떨어져 있었던 것일까.
4년 전 오스트리아로 유학을 가기로 결심했었다. 음악에 대한 사랑과 열정 때문이었다. 바이올린을 처음 접했던 순간, 나는 평생 내가 음악을 하리라는 것을 느꼈었고, 그래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빈으로의 유학은 내게 있어서 꼭 거쳐야 할 과정이었다. 그렇지만 그 결정을 내리는 것이 쉬웠던 것만은 아니었다. 분명 1년 전이었다면 그런 망설임이 없었을 테지만.
“히노 상. 오늘 저녁 함께 먹지 않을래?”
그전 날 저녁부터 수천, 수만 번을 고민했던 것을 마침내 입 밖으로 꺼냈다. 처음엔 역시 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인사를 하고서 뒤돌아 걸어가는 모습을 보고서 손이 먼저 나가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계획하지 않았던 것이라서 어딜 가야 할지 몰라서 당황해버렸다. 의식하지 못하는 틈에 인상을 쓰고 있었던 것인지 그녀는 쿡쿡 웃으며 사주는 것이냐고 물었다. 그럴 생각이었기 때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후훗. 그러고 보니 선배는 오늘따라 이상하시네요-. 음, 혹시 파스타 싫어하세요? 싸고 맛있는 집, 저 알고 있는데.”
당시엔 당연하지만, 무엇을 먹건 그건 중요하지 않았다. 괜찮다고 대답하자 히노는 코트 소매의 한 쪽을 잡더니 나를 끌고 달리기 시작했다. 당황해 하자 그녀는 크게 웃었다.
“이렇게 달려야 더 맛있게 먹잖아요~”
일식을 즐기는 편이라 이탈리안 음식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해서 그녀가 대신 여러 가지를 주문했다. 꽤나 아기자기한 가게여서 어쩐지 그곳에 그녀와 단 둘이 앉아있는 것이 굉장히 쑥스러웠다. 음식이 나왔지만 그녀가 자꾸 신경 쓰여서 음식이 코로 들어갔다 해도 모를 지경이었다. 물론 실제로 그랬던 것은 아니다. 식사 후엔 레스토랑을 나와서 히노의 집 쪽으로 갔다. 가는 동안 뭔가 대화를 나누었지만 그 때 당시 제정신이 아니었던지, 대화내용은 하나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히노의 집 앞에 도착하자 또 다시 갈등이 밀려왔다. 혼자 고민에 빠져있는데 ‘짝’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히노가 내 눈 앞에서 자신의 손뼉을 친 것이었다. 아마 이야기도 하지 않으면서 그렇다고 집에 잘 들어가라며 보내주지도 않는 것이 이상해서 그랬던 것이리라.
“오오사키 선배- 하실 말 있으시죠?”
그 말을 들으니 귀가 달아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히노는 내가 무언가 할 말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재촉하지 않고 기다려주었던 것이다. 말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너무 떨려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 왜 그러세요? 선배가 떠시니까 저까지 떨려요~”
장난스럽게 웃는 모습을 보니 역시 말하지 않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괜한 말을 꺼내서 지금까지 쌓아온 관계를 무너트리고 싶지 않았다. 외국으로, 그것도 먼 곳으로 4,5년을 유학가면서 그녀를 붙잡아두는 것은 정말이지 염치없는 행동이기도 하고. 마음이 아프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도 고백은 해선 안 된다.
“아-응, 그렇지….음, 나 유학 갈 것 같아. 가려면 아직 한참 있어야 하지만… 일단은 히노 상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고 있는 입장이니까 이런 거 미리 말해둬야 할 것 같아서….”
히노의 얼굴이 아닌 그녀의 집 쪽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했다. 얼굴을 보고서는 도저히 말이 나올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후웁’하고 숨을 들이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축하해요, 하는 말이 들려왔다.
“역시 선배 같은 분이 국내에만 계시긴 아깝죠. 에- 얼마 동안 유학생활 하시는 거에요?”
“아, 그게 4,5년 쯤이려나.”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히노가 한숨을 쉬었던 것 같다. 어쩐지 시들해져 버린 그녀의 미소는, 그녀가 고개를 숙이는 통에 볼 수가 없었다.
“이제 더 이상 오오사키 선배에게 바이올린을 배울 수 없는 거군요.”
“미안해, 히노 상. 그치만 이제 히노 상의 바이올린 연주 상당히 좋아졌으니까-.”
“그런데. 하실 말씀… 그것 뿐인가요?”
고개를 들어 정면으로 쳐다봐오는 그녀는 눈에 상당히 힘을 주고 있었다. 긴장감…아니 그보다는 간절함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런 눈이었다. 히노의 의중을 알 수가 없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해야 할 말이 뭐가 있을지 고민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보다 떠오르는 것은 그녀에 대한 마음뿐.
“하실 말씀은 그것뿐이었군요….”
“아, 미안해- 히노 상.”
무엇이 미안한지도 모른 채 반사적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돌아온 것은 잔뜩 풀이 죽은 듯한 목소리로 내뱉어진 말, ‘아니에요’였다.
그 이후 그녀와의 레슨엔 이상한 어색함이 느껴졌다. 처음엔 단순히 그녀의 기분이 안 좋은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얼마가 지난 후에야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학생을 가르치는 것,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어렵네요 선생님.”
“어느 학생? 유치원 꼬꼬마들? 아니면 오케부 녀석들? 아니면 히노?”
카나자와 선생님이 한 쪽 눈썹을 살짝 위로 밀어 올리며 ‘히노?’하고 언급했을 때, 마치 죄를 지은 범죄자가 경찰 앞에 서 있는 것처럼 가슴이 철렁했다. 대답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깍지를 낀 손으로 턱을 받치고 대답했다.
“음- 히노 상이요.”
‘역시’하는 표정으로 얼굴을 찡그리던 선생님은 상대 앞에서 아주 드러내놓고 한숨을 쉬셨다.
“오오사키 너, 점잔 빼는 거냐? 뭐, 네 표정을 보면 그렇진 않은 것 같다마는….”
다짜고짜 점잔 빼는 것이냐는 선생님의 직설적인 말에 당황했다. 사실 내가 왜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하는가 자체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이봐 오오사키. 학생도 학생 나름이라고. 어휴, 너도 정말 음악 실력 빼고 나면 볼 게 없는 놈이라니까. 정말로 모르겠냐? 히노는 사춘기의 여고생이라고, 이 맹추야. 너는 아직 젊은 녀석이 자기 마음 하나 제대로 못 얘기하면 어떡하냐?”
나도 모르게 ‘어엇’하고 소리 내어버렸다. 역시나 선생님은 내 비밀스러운 마음을 알고 계셨나 보다. 나이를 먹다 보면 다른 사람들의 연애관계가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오는 것일까.
“너희 둘 때문에 속앓이 하는 녀석들도 생각해줘야지 않겠어? 히노 그 녀석, 성격은 전-혀 여성스럽진 않지만 확실히 사람들의 이목을 잡아 끄는 힘이 있는 녀석이니까 말야. 너 말이지- 그렇게 느리 빼다가는 다른 녀석이 먼저 채갈거다~. 그래도 나름 아끼는 제자니까 해주는 어른의 충고라고.”
카나자와 선생님의 말씀에 뭔가 번쩍하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히노의 얼굴은 지나가던 사람이 다시 쳐다볼 정도의 빼어난 얼굴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그녀에게는 그 나이 또래의 여자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발랄함과 반짝임이 있었고, 다른 여자아이들에게서는 찾아보기 힘든 순수함이 있었다. 음악을 시작하지 않았던 때의 히노는 잘 모르지만, 음악을 하고 있는 히노는 굉장히 매력적인 여성이다. 본인은 잘 모르는 것 같지만. 선생님의 말을 듣고 생각해보니, 그녀를 좋아하는 다른 사람이 있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역시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이 여럿 있을지도 모른다고 것을 깨닫고 보니 어쩐지 충격이었다.
“좋아, 오늘은 여기까지 하자. 갈수록 실력이 쭉쭉 느네. 가르치는 사람으로서 굉장히 보람 되.”
진심어린 칭찬에 빙긋 미소를 짓는 모습에 나도 모르게 눈을 피해버렸다. 가만히 그녀가 바이올린을 소중히 가방에 넣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주말에도 음악 연습실을 빌려주는 학교에 마음속으로 감사하며 석양에 한층 반짝여 보이는 히노의 머리를 보고 있는데, 그녀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내게 말을 걸었다.
“선배는 여자 친구 있으세요? 아, 그러니까 선배는 대학생이시니까 있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어서요.”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물론 나에겐 깊게 혹은 가볍게 사귀는 여자는 없다. 만약 그런 상대가 있다면 나는 굉장히 나쁜 사람이다. 마음속은 온통 히노 뿐이니.
“아아- 없어. 꽤 전엔 있었지만.”
“에~ 그러면 음- 유학 떠나실 때까지 뭐하세요?”
생각해보니 출국일까지 계획해 놓은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학교엔 이미 휴학을 신청해 놓았고, 유치원에 아이들을 가르치기 위해 가는 것도 이제 곧 다른 사람에게 인수인계 할 텐데.
“그러고 보니 아무 계획도 없네. 글쎄. 그냥 연주회 다니고, 미리 예습이라도 해야 할까. 히노 상 레슨은 계속 해줄게.”
또각 또각, 명랑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뒤지지 않게 내 심장 소리가 커서 창틀 난간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주었다. 히노가 상당히 근처로 다가왔는지 부드러운 향이 코 끝을 찔렀다.
“그렇게 보내긴 아깝잖아요, 선배! 유학 가서 열심히 공부하실 텐데 가기 전에라도 놀아야죠~”
“히노 상이 같이 놀아줄래? 아아. 그냥 해본 말이야. 즐겁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어서.”
유학 얘기를 꺼냈던 날은 입 속 깊숙이 꽁꽁 숨어버렸던 말이, 뇌의 통제도 거치지 않고 튀어나왔다. 지난번 선생님께서 하셨던 말에 자극을 받았던 것인지 아니면 정체도 모르는 연적들에게 나도 모르게 질투를 느꼈던 것인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미 뱉어진 말이었다. 결국 대충 얼버무려 버렸지만 그 후의 정적이 나를 짓눌렀다.
“저는- 좋아요. 저는 좋아요, 선배.”
어설프게 고백 아닌 고백을 하고서 차였다는 생각에 절망하고 있는데, 수줍음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고 그녀를 쳐다봤다. 그녀는 홍당무 같은 얼굴을 하고는 양손을 꼼지락 거리고 있었다.
히노와의 첫 데이트 전날 밤부터 긴장이 됐다. 점심 이후에 만나는 것임에도 이미 입고 나갈 옷은 결정해 놓은 상태였다. 내일 잘 할 수 있을까-하고 걱정하는 사이에 잠들어 버렸다.
너무 긴장했던 탓인지 약속장소에는 거의 40분이나 일찍 도착해버렸다. 기다리는 동안 마시고 있을 녹차를 주문하고서 가방 속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던 소설책을 꺼냈다. 한 음악가의 사랑에 관한 책이었는데 그리 재밌지 않아서 그 동안 가방 속에 넣어두기만 했던 책이었다. 그렇지만 한번 잡은 책이었으므로 끝까지 읽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사명감 때문에 다시 꺼내 들은 것이다. 물론 히노가 올 때까지 시간을 죽일 겸해서. 녹차를 마시며 책을 읽고 있는데 ‘톡톡’하고 테이블이 경쾌하게 울렸다. 고개를 들어보니 아직은 추운 바깥 날씨 탓으로 볼과 코가 빨갛게 물들어 있는 히노가 있었다. 그녀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더니 핸드폰을 꺼낸 시간을 확인했다.
“25분이나 일찍 나왔는데도 선배에게 져버렸네요.”
어린아이 같이 웃으며 맞은편에 앉아 옅은 회색의 코트를 벗었다. 그 모습이 아주 자연스러워서 넋을 놓고 보았다.
“엇, 선배도 그 소설 아세요? 저도 그 소설 봤어요. 오오사키 선배도 그런 류의 소설을 보시는구나- 어쩐지 의외에요! 그 음악가 너무 멋있지 않아요? 모드 양에 대한 사랑이라거나가.”
꺅꺅 거리며 남자 주인공이 멋있다는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뿐이었다. 남자와 여자의 보는 시각의 차이인지 아니면 감수성이 풍부한 여고생과 성인남자의 차이인지, 나는 남자 주인공이 그리 멋있다는 생각이 안 들었다. 그녀는 한참을 소설에 대해 재잘거렸다. 그리고 마지막에는 ‘저도 그런 사랑을 해보고 싶어요’ 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마무리 지었다. 살짝 붉히는 모습이 마치 아이 같아서 나도 모르게 웃어버렸다. 그러자 그녀가 나를 원망스러운 듯한 눈으로 쳐다봤다.
차를 마시며 몸을 잠시 녹인 후에 카페를 나왔다. 다음엔 무엇을 할지 고민하다가 아쿠아리움에 가기로 했다. 어렸을 적 부모님의 손을 작고 왔던 것이 마지막이라 상당히 신선했다. 히노는 돌고래가 너무 귀엽다며 그 앞을 5분 넘게 떠날 줄 몰랐다. 아쿠아리움을 나와서는 그냥 길거리를 돌아다니기로 했다. 참 이상하게도 그때서야 히노와 데이트 중이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긴장해버렸는지 그녀가 묻는 말에 겨우 겨우 답할 수 있는 정도였다. 어떻게 해야 히노를 즐겁게 해줄 수 있을까 생각하며 걷는데, 차가워진 손에 갑자기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는 곧바로 그것이 히노의 손임을 알 수 있었다. 여자아이답게 작고 가는 손이었다.
“그렇게 긴장하지 말아주세요, 선배. 남들이 우리가 나쁜 짓하고 있는 줄 알겠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나니 내가 얼마나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었을 지가 상상되어 창피해졌다. 처음으로 잡는 여자의 손이라서 굉장히 부끄러웠지만 그녀가 먼저 내밀어준 손을 놓고 싶진 않았다.
“오오사키 선배, 어서 오세요. 웃으며 인사할 시기는 아니죠, 지금이…. 차 대기시켜놨으니 함께 병원에 가요. 다들 기다리고 있어요.”
역시 4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여자로 착각할 만큼 곱상하고 예뻤던 유노키는 제법 남자다운 매력을 내뿜고 있었다. 길었던 머리를 자른 모습이어서 솔직히 조금 놀랬지만, 그 역시도 굉장히 잘 어울렸다. 그는 내게 애매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반가움과 슬픔이 뒤엉켜있는 미소였다. 내가 떠나있었던 4년의 시간 동안 그는 히노의 ‘친한 선배’로서 옆을 지켜줬을 것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모두 그랬을 것이다. 가슴에는 차마 그녀에게 꺼내 보일 수 없는 온기를 품고서.
병실에 가까이 갈수록 쿵쿵 심장이 요동쳤다. 머리는 어지러웠고 손발이 떨려왔다. 의식 없이 누워있을 히노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려 병실을 향해 가는 것이 무서웠다. 1002호. 그녀의 병실 앞에 도착하니 낯익은 얼굴들이 보였다. 빈에서 꽤나 보고 싶었던 얼굴들. 의자에 앉아있던 그들은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노키에게 내가 곧 도착한다는 연락을 받고 모두 복도로 나온 모양이었다.
“오오사키 오랜만이다. 간간히 좋은 소식 들었다.”
“선배, 정말 잘 오셨어요.”
그리웠던 얼굴들이 저마다 한 마디씩하며 미소 지어주었다. 하지만 그들의 상냥한 말과 미소는 날카로운 칼처럼 나를 사정없이 찔렀다. 그들의 그 상냥함이 마치 나를 향한 꾸짖음처럼 느껴졌다. 그들은 자신들의 소중한 사람을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묶어놓고서 그녀를 일본에 남겨두고 빈으로 떠나버린 나를 원망하고 있을 것이다. 이 사람들의 슬픈 미소 뒤엔 나에 대한 증오심이 있지 않을까? 두렵다.
“어- 유노키가 특실을 쓸 수 있게 힘을 써줬어. 아모우랑 후유우미가 함께 간병하겠다고 고집을 부려서 따로 간병인은 쓰지 않았고. 음. 우리는 네 얼굴도 봤으니 이만 가볼 테니까 어서 히노에게 가봐. 계속 너를 기다려온 녀석이니까.”
카나자와 선생님의 손이 어깨에 닿아 따뜻한 무게감을 주었다. 히하라 및 유노키, 츠키모리, 츠치우라, 시미즈와 카지는 히노가 곧 의식을 찾고 괜찮아질 것이라며 너무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위로하고 갔다. 후유우미와 아모우는 눈물을 내게 보이지 않으려는지 고개를 숙인채 인사를 하고 다른 사람들을 따라 갔다. 조용한 복도에 혼자 남게 되었지만 선뜻 발을 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한 참을 그렇게 오도카니 서 있었다.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심호흡을 했다. 이 문을 열었을 때 히노가 ‘짠’하고 나타나 ‘놀랐죠?’하고 말해주면 얼마나 좋을까. 내가 빈에서 전화로 들었던 사실들이 모두 거짓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이 문 너머에 누워있을 여인이 나의 연인이 아니면 얼마나 좋을까…. 눈시울이 또 뜨거워지는 것이 느껴져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는 울 자격조차 없는 놈이니까.
하얀 이불을 덮고 누워있는 히노는 예전에 비해 너무나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보기 좋게 올라있던 살은 온데간데없었다. 예쁜 옷 대신 하늘색의 환자복을 입은 채 수 많은 선들에 연결되어 있는 히노. 저 선들이 그녀의 기운을 모두 빼앗아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 가엾은 연인아 내 사람아. 가만히 손을 뻗어 여전히 따스한 뺨을 감쌌다. 그녀의 이마에 내 이마를 가져다 대고 오열했다. 이렇게 시들어버린 연인의 모습이 너무나 안쓰러워 울음 밖에 나오지 않았다. 아, 나는 지난 4년간 무엇을 한 것이란 말인가. 해주지 못한 것이 너무도 많다. 그녀의 생일을 제대로 옆에서 챙겨준 적도 없다. 그녀가 그토록 원했던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일도 해주지 못했다. 부끄럽다는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어왔던 일. 왜 나는 그녀가 나를 향해 다정히 속삭여줄 때 그녀의 이름을 불러주지 못했던 걸까.
“다녀왔어…. 다녀왔어… 카호코…”
그 동안 너무나 연습해왔던 이름을 불러본다. 그녀가 5년을 기다려왔을 세 글자, ‘카호코’. 아아 부탁이니 제발 눈을 떠줘…. 제발- 제발, 나의 연인아-
“카호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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