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木日] 반지
금색의 코르다, 유노키 아즈마 × 히노 카호코.
2008.12.22 작성.
요즘 들어 자신에게 소홀해진 것 같다며 뾰로통해져있는 연인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잔뜩 움츠려있는 어깨를 자신 쪽으로 끌어안았다. 연인은 움찔거리며 놀라더니 샐쭉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반지
W. 소담(@kimiga_iru)
“이런 걸로 슬쩍 넘어 가려고 하지 말라구요…”
귀엽게도 그녀는 그 말을 한 후에 얼굴을 한층 붉어진 얼굴로 푹 숙이고는 그의 품으로 더욱 파고 들어왔다. 그 동작 하나, 하나가 사랑스럽게 느껴져서 유노키는 혼자서 비실비실 웃으며 옷으로 겹겹이 쌓여져있는 상대의 어깨에 힘을 실었다.
“또 한 해가 지나가버렸네요…. 죄송해요, 선배. 요즘 굉장히 바쁘다는 것도 알고. 그래서 나한테만 신경 쓸 수 없다는 것도 저, 잘 알고 있는데……. 요새는 자꾸 투정만 부리게 되네요.”
“그래서?”
이런. 또 쌀쌀맞은 말이 흘러나왔다. 확실히, 일전에 그의 연인이 말했던 것처럼 그의 성격은 꽤나 꼬여있나 보다. 속으로는 비웃고, 경멸을 느끼는 상대들에게는 겉으로 온화한 미소를 아주 잘 지어보이는 그이다. 그가 그들에게 짓는 미소는 지극히 자연스러워서 아무도 유노키가 속으로는 그들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을 모를 정도이니 말이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그는 그 누구에게도 보인 적이 없는 어두운 일면을 자신의 연인에게만은 숨김없이 보였다. 문제는, 그녀가 보지 않는 곳에서는 그녀에 대한 마음으로 절로 미소를 지으면서도 그녀에게는 저도 모르게 자꾸 차가운 말을 던져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다행히도 연인인 카호코가 그의 그런 행동을 꿰뚫어보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가 지속되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선배가 힘들어보여서 그걸 보고 있는 게…어려워요.”
“의도한 일은 아니지만 미안.”
조금 더 다정하게 말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라고 생각하며 유노키는 일부러 고개를 돌려버렸다. 카호코의 시선을 느끼며 일부러 주변 풍경을 둘러본다. 기온이 낮은 추운 날이지만 이렇게 공원의 벤치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았다. 모처럼 경호원들 없이 하는 데이트였기 때문에 더욱 그 시간이 소중했다.
“역시 할머님은 아직이시죠…?”
“그렇게 됐네.”
“괜찮아요! 아직 저도 결혼 생각은 없고….”
이제는 유노키, 그 자신도 그리고 그의 연인 카호코 또한 결혼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볼 나이였다. 몇 년째 연인관계를 지속해오고 있지만 유노키는 그의 할머니에게 자신들의 관계를 제대로 밝히지 못했다. 고등학생 시절에 할머니께 카호코를 향해있는 자신의 마음을 언뜻 내비친 적이 있었지만 그녀는 유노키의 말을 곧바로 묵살해버렸다. 그렇게 해서 비밀리에 사귄 것이 몇 년째다. 집으로부터 슬슬 결혼압력을 받고 있을 연인에게 미안함을 느꼈다.
“집에서 계속 결혼 얘기하셔?”
“아, 아. 괜찮아요, 그런 거. 선배는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되요~ 저도 아직 생각 없구요.”
분명 거짓말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슬픈 표정을 하고 있을 리가 없다. 유노키는 뭐라 위로해주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몰라서 결국엔 장갑을 끼고 있는 카호코의 손을 잡았다. 그녀는 맞잡은 손을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해맑게 웃는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이 아닌 것을 해야만 하는 유노키에게 있어서 활력소는 그녀 뿐이었다.
오랜만에 하는 데이트였지만 갑작스럽게 시간이 생겨서 만난 것이었기에 아무런 계획이 없었기 때문에 그냥 시내를 돌아다녔다. 물론 손을 꼭 잡은 채.
“예쁘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여서 그런지 시내 가게들은 전구로 장식을 해놓고 있어 반짝반짝 하는 것이 보기가 좋았다. 카호코가 걸음을 멈춘 가게 역시도 전구로 장식되어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감탄을 자아낸 것은 분명 그 전구들이 아니리라.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쥬얼리 샵이었다. 그 곳은 크리스마스를 겨냥하여 연인들을 위한 예쁜 반지들을 창가에 진열해놓고 있었다. 카호코가 물끄러미 그것들을 바라보고 있자 점원이 나왔다.
“어서 오세요. 들어와서 구경하세요. 연인들을 위한 예쁜 반지들이 많습니다. 여자 분께서 어울리는 것들도 많아요.”
점원이 말을 걸어오자 카호코는 당황해서는 얼굴을 붉힌다. 사귀기 시작한 것이 몇 년째인데도 아직도 ‘연인’이라는 단어에 얼굴을 붉히는 그녀였다. 유노키는 ‘그럼 들어가 볼까’ 하고 말했다. 그의 그런 말을 예상치 못했던 것인지 카호코는 놀라서 유노키를 쳐다봤다. 여자들은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더니 역시나 그 말이 맞긴 한가보다. 카호코는 전구들만큼이나 예쁜 광채의 반지 등의 쥬얼리들을 돌아다니며 신난 듯 바라보았다. 카호코를 보며 유노키는 자신이 여태껏 목걸이라거나 팔찌 같은 장신구를 한번 도 선물한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손님, 혹시 결혼반지 찾으시나요? 손님께는 이런 종류가 어울릴 것 같은데….”
카호코가 한 반지 앞에서 그것을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자 점원은 친절하게 웃으며 카호코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지만 카호코는 그 말에 놀랐는지 두 손을 크게 저었다.
“선배, 우리 빨리 나가요.”
유노키는 카호코에 의해 거의 가게에서 끌려나오다시피 했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 나름의 배려일 것이다. 결혼 이야기를 꺼낼 수 없는 그를 위한 따뜻한 마음.
“올 크리스마스에 만날 수 있을까요, 우리? 저번처럼 같이 케익도 먹고 그랬으면 좋겠는데….”
“시간 내볼게.”
“바쁘시면 그러시지 않으셔도 되구요.”
카호코는 유노키를 바라보며 베시시 웃었다. 유노키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을까 하다가 가볍게 꿀밤을 때렸다.
“한번쯤은 ‘유노키님 제발 크리스마스를 같이 보내주세요~’ 하고 말하라고.”
“에에- 아무리 그래도 저, 그런 식으론 안말한다구요!”
연인의 달콤한 시간은 유노키의 비서의 전화로 끝나버렸다. 유노키의 비서로부터 곧 할머니가 돌아오시니 어서 오라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여느 때처럼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누고 유노키는 연인이 집에 가는 모습도 보지 못하고 자가용을 타고 집으로 급히 향했다.
크리스마스만은 어떻게 해서든 카호코와 보내고 말겠다는 생각에 유노키는 모든 일을 미리 해두었다. 그래서인지 무척 피곤하긴 했지만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단잠보다도 카호코의 목소리와 미소였다. 문제는 할머니에게 크리스마스에 왜 나가야 하는 지 설명하는 것이었는데, 그 문제도 생각보다 쉽게 풀렸다. 유노키의 연애에 대해 알고 있는 그의 형들이 적당한 변명을 해주겠다고 나섰기 때문이다. 일전에 어쩌다보니 카호코를 두 사람에게 인사시켰었는데, 그들은 밝고 싹싹한 모습이 꽤나 마음에 들었나보다.
"여기에요 선배~“
카호코는 기분이 상당히 좋은지 평소보다 더 밝게, 그리고 더 크게 손을 흔들며 맞이해주었다. 두 사람은 일단 레스토랑으로 이른 저녁을 먹으러 가기로 했다. 음식이 나오기 전 두 사람은 이런 저런 잡담을 나눴다. 주로 말하는 것은 카호코였지만. 그녀는 그 전날인 크리스마스에 고등학교 선배인 오오사키와 히하라를 도와서 어린이집에서 공연을 했던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식사는 맛있게 했다. 미리 주문해두었던 케이크의 모양이 아기자기 했던 것이 마음에 들었는지 그녀는 핸드폰으로 사진까지 찍어놓았다. 어쩐지 아깝다며 아쉬워하면서 케익을 한 입 먹더니 그녀는 맛있다며 행복한 듯 미소 지었다. 저녁 식사를 마치고서는 저번처럼 정처없이 돌아다니기로 했다. 자주 만날 수 없는 탓에 두 사람 다, 영화관에 가서 영화를 관람하는 것보다 서로의 목소리를 들으며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이다. 카호코는 어린 아이들에게 바이올린을 가르치는 것이 즐겁다며 유노키도 계속 음악을 했으면 좋았겠다며 아쉬워했다. 사실 그도 음악에 대한 미련이 있었다. 플룻을 계속 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유노키에게 주어진 길은 두 형들을 보좌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도착한 곳은 아주 크지도 아주 화려하지도 않은 카페였다. 적당히 아담하면서도 거추장스럽지 않게 크리스마스 장식을 해놓은 것이 마치 자신의 연인처럼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유노키였다. 에스프레소 한 잔과 화이트모카 한 잔 그리고 예쁘게 진열되어있는 조각케익 두 개를 주문했다. 그것들은 얼마 기다리지 않아서 그들의 앞에 예쁘게 장식되었다.
“아까의 케익도 굉장히 맛있었는데, 이것도 맛있어요!”
아이처럼 즐거워하는 카호코를 미소 지으며 바라보고 있자니 준비해두었던 선물이 떠올랐다. 그는 슬쩍 주머니 속으로 손을 넣어 선물을 만지작거렸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카호코는 가방을 열어 무언가를 꺼내더니 그의 앞으로 내밀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이에요, 선배. 메리 크리스마스! 넥타이와 타이핀이에요.”
기쁜 마음으로 선물을 받아 들고는 포장을 조심스럽게 풀었다. 자주 즐겨 입지는 않지만 종종 양복을 입어야 했다. 그녀가 고른 넥타이는 무난하면서도 제법 고급스러워 보였다. 그녀를 향해 미소를 잠시 지은 후, 주머니 속의 선물을 손에 쥐며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유노키가 진지한 표정을 짓자 카호코도 덩달아 진지해졌다.
“카호코.”
“네넷!”
“이거 내 크리스마스 선물이야.”
그는 준비해두었던 선물을 꺼내서 조심스럽게 앞으로 내밀었다. 카호코의 시선이 선물이 들은 푸른 케이스로 고정되었다. 그녀는 그 케이스를 조심스럽게 열려고 했으나 유노키가 그것을 제지했다.
“잠깐. 내 이야기를 좀 들어줘. 내 이야기를 들은 후에 열어야 해.”
케이스를 열려던 그녀의 손은 멈췄고, 무슨 얘기를 하려는 것인지 감이 잡히질 않는지 조금은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유노키를 쳐다봤다.
“그건 네 생각대로 반지가 맞지만, 그냥 반지가 아니야. 전쟁의 시작을 알리는 그런 반지지. 그 반지를 받는다는 건 나와 앞으로 함께하고 싶다는 증거고, 그걸 받게 되면 할머니와의 긴 싸움을 피할 수 없어. 그런데도 그런 것들이 상관없다면 내가 그 반지를 너에게 끼워주고 싶어.”
긴장을 해버린 탓에 말이 꼬이기라도 한 것일까, 카호코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반지 케이스를 잡더니 조심스레 그것을 열었다. 그녀는 조금 놀라더니 다시 미소를 지었다. 일전에 함께 들어갔던 쥬얼리샵에서 예쁘다고 생각했던 반지가 케이스에 꽂혀있었기 때문이다. 카호코는 반지 케이스의 방향을 돌려 유노키가 반지를 볼 수 있게끔 했다.
“선배도 참~. 그럴 땐 말이죠. ‘앞으로도 쭉 내 사람이 되어줘’ 라거나, ‘나와 결혼해 주겠어?’ 라거나 음- 그래, ‘네가 준 넥타이들 앞으로 네가 계속 내게 매어줬으면 해’ 라거나… 그런 말들을 하는 거라구요. 그렇게 어렵게 말하지 않으셔도 저는… 이 반지의 주인은 저뿐이잖아요. 안 그래요?”
힘든 싸움이 될 것임을 유노키도 카호코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은 겁을 내기보다는, 테이블을 가로질러서 손을 맞잡고는 눈이 내리는 창밖을 쳐다볼 뿐이다. 두 사람이 같은 곳을 바라보고 있는 한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유노키는 잡고 있는 연인의 손의, 조금은 차가운 무언가가 거슬리긴 했지만 그래도 그녀의 손을 꽉 쥐었다. 반지의 장식 모양 자국이 손바닥에 생기든 말든, 그건 이미 그의 안중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