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것은 조금 먼 기억이다. 정확히 언제의 기억인지는 몇 번이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날 이때가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그, 아카바네 후타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잇세이와 타카미치가 각자 다른 사정으로 인해 하교를 함께 할 수 없던 어느 오후, 후타미는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번화가의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봐야 귀를 따갑게 할 것은 분명 어머니의 잔소리일 것이다. 화도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강제시키는 꽃꽂이 수업은 너무나 싫었지만, 그래도 꽃꽂이는 제법 자신 있는 편이었고 스스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아아~ 오늘은 윳쨩도 없고... 심심하네~ 집에 가긴 싫은데~"
서점에 들러 신간 만화책을 뒤적이고 자주 가는 인형가게에 들러 좋아하는 동물 인형 시리즈가 새로 나왔는지 확인을 마치고 나니 할 것이 없었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인상대로의 붙임성 있는 말씨 덕에 초면인 사람들에게도 편한 인상을 주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고등학생이 되어 함께 다니기 시작한 지금의 친구들을 사귀기 전에는 그에겐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친해지기 쉬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후타미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며 그는 많이 보아왔다.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 사이면서도 누구 한 명이 자리에서 빠지면 자리에 없는 그에 대해 신이 나서 험담하는 사람들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배 안 쪽에서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 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지금처럼 나를 욕할까?'라는 생각이 어떻게 해도 그의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거리를 두며 사람들을 사귀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마음을 터놓고 지내거나 여기저기를 놀러 다닐만한 친구는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것이 불과 2년도 안 된 일이건만 이제는 지금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혼자 있는 시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발치에 걸리는 작은 돌멩이를 어딘가로 차버리는데 저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아 어느 상점에서 이벤트라도 하는 것이리라. 마침 따분하던 참이라 후타미는 소란스러운 틈바구니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가니 멀찍이서 봤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럴 때는 큰 키가 도움이 된다며 후타미는 자기보다 키가 작은 여자아이들 무리의 머리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사람들의 이목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 낯익지만 낯익지 않았다.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눈을 크게 뜨고는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후타미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얼마쯤 손을 흔들었는지 그의 팔이 저려올 즈음, 상대방과 눈이 부딪혔다. 상대는 놀란 듯 평소에도 작지 않은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향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후타미 군!"
소란이 잠잠해질 무렵 상점 뒤편의 주차장에 주차된 검은색 밴 앞에서 아사히나 유즈키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 쪽으로 다가서며 후타미는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깜짝 놀랐어! 후타미 군이 여긴 어쩐 일이야?"
"아아, 오늘 잇세이랑 타카미치가 일이 있어서 혼자 시간 떄우러 나왔어~ 그보다 나도 깜짝 놀랐다고~"
"응?"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을 못한 듯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평소 보지 못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 모습이 다른 때보다 더 귀엽게 보였다.
"에에, 윳쨩 오늘은 무대용 의상이잖아. 뭔가 신선한 걸~"
그의 답에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잠깐 내려다본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네' 하고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즐거운지 혼자 쿡쿡 웃던 그녀는 별안간 몸을 돌려 자동차 뒷좌석에서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을 꺼내 그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한 것인지 그녀는 금새 핸드폰을 닫았다.
"후타미 군은 이제 약속이나 그런 거 있는 거야?"
"으음 아니~ 할 일이 없어서 이대로 집에 가야 할까 하던 참."
"앗, 그래?"
기쁜 듯 눈을 반짝이며 그녀는 조수석의 창문 안으로 몸을 기울여 운전석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친구랑 돌아갈게요 프로듀서!' 하는 말소리에 후타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친구인 그녀와 함께 이 지루한 시간을 때울 수 있다면 기쁜 일이긴 하지만.
"엣, 윳쨩 정말 괜찮아? 스케줄은~?"
"오늘은 이게 끝! 나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그녀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당연한 듯 그의 품에 자신의 가방을 안겨주고는 그녀는 자신의 사복이 든 플라스틱 봉지를 들고 상점 안쪽으로 향했다.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자동차 쪽을 바라보니 조금 전에 그녀가 '프로듀서'라고 불렀던 말끔하게 생긴 미남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럼 오늘은 아사히나 양 잘 부탁할게요. 늦지 않게 바래다줘요."
네, 하는 별 것 없는 그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유즈키의 프로듀서가 운전하는 검정색 밴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떠맡은 그녀의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멍하니 서있다 보니 상점의 뒷문을 열고 그녀가 나왔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외모를 더 빛나게 했던 옅은 노란색의 원피스는 간데 없고 목 주변만 바다색으로 되어있는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그녀가 있었다.
"에에~"
"뭐야, 그 반응은? 엄청 아쉬워하는 표정이네."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후타미의 안타까운 탄식에 그녀는 짓궂게 미소 지으며 그의 품에서 자신의 가방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당연한 것처럼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어라, 윳쨩 어딜 가는 거야?"
"이대로 바로 집에 가기는 아쉽지 않아? 조금 돌아서 가자. 나 저 아래 카페의 소프트 콘 정말 먹고 싶었거든."
다시 원래의 그가 알던 그녀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이 후타미는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어 아쉽기도, 원래 알고 있는 아사히나 유즈키라는 친구를 되찾은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했다. 후타미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따라잡고는 그녀가 들고 있는 두 개의 짐 중 원피스 와 구두, 그리고 아까까지 그녀가 하고 있던 장신구들이 들어가 있는 플라스틱 봉지를 뺏어 들었다.
"이건 내가~"
"고마워, 후타미 군."
혼자 있을 때는 좀처럼 가지 않던 시간 금새 지나가버렸다. 한 것이라고는 아까 그가 들렀던 서점에 다시 들러 신간 책들을 보고 그녀가 사고 싶어 점 찍어 두었다던 책들을 사는 것, 전부터 가고 싶었다던 카페에 가서 소프트 콘을 각자 들고 나와서 거리를 걸으며 먹은 것 정도. 그녀가 결석했던 오늘 타카미치가 어떤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스러운 발언을 했고 그것 때문에 잇세이와 자신이 어떻게 놀렸는지 등의 시시껄렁한 학교에서의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혼자 사는지 원룸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건물을 스윽 훑어 올려다보는데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말 안 했지?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거든. 뭐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다음에 잇세이 군이랑 타카미치 군이랑 해서 정식으로 초대할게!"
왜인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저녁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든 시간이니 친구라곤 하지만 동갑내기의 이성을 방에 들여 단 둘이 있는 것은 친구로서 잔소리 해주고 싶은 일이었다. 비록 상대가 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고마웠어, 후타미 군. 조심해서 들어.... 아..."
그녀가 그에게 팔을 양쪽으로 흔들며 인사를 할 때였다. 톡톡, 작은 빗방울이 두 사람의 머리며 어깨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후타미는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같은 생각을 했다.
"후타미 군!"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는 그녀 때문이었다. 얼굴에 비가 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하늘로 향했던 시선을 거둬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언제 어디서 꺼냈는지 옅은 연두색의 3단 우산을 그에게 건네고 있었다.
"괜찮다면 이거 쓰고 가."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타미는 지루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집은 저 자신의 집과 정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제법 되는 거리를 돌아가야 했지만 오늘 소프트 콘을 그것을 맛있게 먹던 그녀의 모습, 좋아한다는 소설 시리즈를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그녀의 모습 등 그의 머릿속을 즐거운 것들이 가득 채우고 있어 따분하지 않았다.
"아아 맛있었지, 그 소프트 콘~ 다음에 윳쨩이랑 또 먹을 수 있으면 좋겠네~"
기지개를 펴듯 두 손을 쭈욱 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문득 겉면보다 조금 더 탁한 색의 연두빛 방수 천에 검정색으로 무언가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후타미는 뻗었던 팔을 다시 끌어와 검정 글씨를 자세히 살폈다.
「朝比奈 柚希」
정갈한 글씨로 우산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쪽 귀를 접고 있는 모양의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귀여워."
검정색의 유성펜으로 그것을 그리고 있었을 그녀를 생각하며 그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날, 우산 아래에서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싹텄다는 걸 후타미가 깨달은 것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