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앞에 선 유즈키는 문고리를 돌려 안으로 들어가지도, 그렇다고 그곳을 벗어나지도 못하고 우두커니 서있었다. 등으로 식은땀이 흐르는 것을 느끼며 그녀는 이미 수백 번도 더 읽은 아이츄 2기생 그룹 란슬롯의 프로필과 그들에 관해 적혀있는 서류를 들여다보았다. 교장 선생님에게 프로듀서로 일해보지 않겠냐는 제안을 받고 그것을 수락하기로 결심하며 분명 이런 날이 올 것이라는 것은 예상하고 있었다. 제안을 받던 당시에 개성이 지나치게 강하고 다루기 힘든 1기생 그룹인 천상천하보다는 알고 있는 사람들이 있는 2기생부터 맡아보라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수 차례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려보았음에도 막상 란슬롯이 모여있는 방 앞에 서있자니 문고리를 잡는 것조차 두려웠다. 그들과 유즈키 사이에는 4년이 훌쩍 넘는 긴 시간의 공백이 존재했다. 일방적인 연락의 단절이었다.
"에이~ 아직도 들어오려면 먼 거야, 윳쨩? 잇세이의 참을성이 폭발하려고 해."
벌컥, 하고 문이 열리며 그 앞에 서 있던 유즈키에게 길게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생글생글 웃고 있는 약간 처진 눈꼬리에 유즈키는 저도 모르게 한 발짝 뒤로 물러났다.
'도망...가고 싶어...'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며 유즈키는 침을 꼴깍 삼켰다. 꽤나 긴 시간이 흘렀음에도 사람 좋아보이는 인상을 주는 처진 눈꼬리는 그대로였다. 보고 싶었던 친구들 중 하나였지만 동시에 보고 싶지 않은 친구이기도 했다. 많은 시간이 흘렀고 마음 속의 상처에도 어느새 딱지가 앉았지만 그럼에도 그 당시를 떠올리는 것은 유즈키에게 상처 딱지를 억지로 떼어내려고 시도하는 것처럼 따끔따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후...후타미군..."
다시 또 한 발짝. 서류파일을 들고 있는 그녀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방 안쪽은 아무도 없는 것처럼 조용했지만 방 안쪽의 그녀에게 보이지 않는 위치에 있는 다른 둘이 자기들 쪽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보고 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아안돼애-"
유즈키가 복도를 슬쩍 곁눈질하는 것을 눈치챘는지 후타미가 평소의 그로서는 보기 드문 빠른 동작으로 그녀의 손목을 낚아챘다. 잡힌 손목과 후타미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며 유즈키는 다시 또 한 번 중얼거리듯 그의 이름을 말했다.
"어이, 후타미!"
정말로 참을성이 바닥나기 시작했는지 잇세이의 다소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후타미는 무섭게 들릴 수 있는 목소리를 듣고도 익숙한 듯 '네에~네에~'하고 답하며 유즈키의 손목을 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그녀의 등에 팔을 둘러 방 안으로 그녀를 이끌었다. 후타미가 평소의 그다운 느긋한 태도로 퇴로를 차단하자 유즈키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하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각오했던 일이고 한 번은 겪어야만 하는 일이다. 속으로 그렇게 몇 번이고 되뇌었다.
"오랜..만이네, 다들."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인사를 건네자 등을 돌리고 있던 붉은 머리의 청년이 호전적인 태도로 몸을 돌려 유즈키를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봤다.
"누군가가 아주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잠적해버린 덕분에 말이지."
다른 사람들이라면 겁을 집어먹을만한 눈빛과 말투였지만 그와 3년 넘도록 친하게 지냈던 유즈키는 알 수 있었다. 그녀의 잠적으로 그가 크게 상처 받았고 그로서는 그걸 이렇게 밖에 표현할 수가 없다는 걸. 그걸 잘 알기에 더욱 뭐라고 답하면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할 말은 그뿐이야? 해야 할 말이 더 많다고 생각하는데."
소파의 등부분에 양 팔을 두른 채 몸을 깊게 누이고 있던 타카미치가 고개를 돌려 말했다. 유즈키는 그의 눈 속에서도 자신에 대한 깊은 원망을 읽을 수 있었다. 그들의 그런 눈을 마주하자 유즈키는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며 발을 뒤로 한 발짝 뺐다.
"어디 또 그래 보던지. 이번에 널 찾아서 우리 앞에 세우는데 5년 정도 걸렸나? 다음 번엔 이보단 덜 걸리겠지."
자조적으로 웃으며 잇세이가 말했다. 두 사람의 말에 마음 한 곳이 저려왔다. 뭐라고 말 한 마디 못하고 계속 서있자 어느새 등이 아니라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있던 후타미가 그녀를 이끌고 잇세이와 타카미치 반대편의 소파로 갔다.
"서서 저언부 이야기 하기엔 다리 아프니까. 앉자, 윳쨩."
두 사람에 비해 아무렇지 않아 보이지만 사실 후타미는 다른 때에 비해 꽤나 감정적이어진 상태였다. 유즈키를 붙잡은 양 손에 상당한 힘이 들어가 있는 것도, 그녀에게 하는 말에 약간의 가시가 돋아 있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미안. 미안해, 전부."
넷이 마주 보고 앉고서도 한참이 지나도록 방 안은 무거운 침묵만이 흘렀다. 기분 나쁜 정적에 질린 잇세이의 눈썹이 꿈틀거리기 시작할 즈음 유즈키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열고 그들에게 사과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전부'가 미안했다. 그들의 연락에 답하지 않은 채 연락처를 바꾸어버렸던 것, 제법 친한 친구였던 그들과 다른 모든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듯 이사를 간 것, 아이돌이라는 꿈을 버리고 도망친 것 등등, 그 전부가.
"말, 안 할 거냐? 그렇게 사라져버린 이유."
"....미안. 말할 수 없어."
"그럼 아이돌이 아니라 프로듀서가 되어서 우리 앞에 선 이유는?"
"같은 이유. 말할 수 없어. 미안."
"어라, 전부 비밀이야?"
"...미안. 너희를 못 믿는다거나 그런 게 아니야. 그냥 말하기 어려운 일이야. 말하고 싶지 않은 일. 부탁이야....... 거의 5년 만에 나타나서 하는 부탁치고 뻔뻔하다는 거 아는데... 더 이상 묻지 말아줘."
신문하듯 차례로 따져 묻는 그들에게 침착하게 답을 한 후 유즈키는 있는 모든 용기를 쥐어짜내 그들에게 더 이상 묻지 말아달라고 이야기했다. 자신이 생각해도 터무니없는 부탁이었다. 하지만 말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는 말하기가 무서웠다. 그 이야기를 꺼내면 다시 약 5년 전의 사고 당일로 돌아가게 될 것 같았다. 두 눈을 감은 채 침을 꼴깍 삼키며 그들의 대답을 기다리는데 그녀의 귀에 들려온 건 세 사람의 긴 한숨이었다.
"...좋아. 더는 묻지 않을게."
고등학생 때와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있는 타카미치가 길게 늘어트려져 있는 왼쪽 머리를 매만졌다. 조금은 화가 누그러진 목소리에 유즈키는 감고 있던 눈을 뜨고 그를 바라봤다. 그녀가 기억하고 있던 고등학생 시절의 앳되고 귀엽던 모습은 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들이 아이츄로 활동하는 것을 매체를 통해 접해왔기 때문에 지금의 모습을 처음 본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어서인지 많이 낯설었다.
"아사히나."
"...응?"
"넌 이제, 아이츄를... 아이돌이 되는 걸 포기한 거냐?"
"...포기한 게 아니야. 꿈이, 바뀐 거야. 아이츄로서 아이돌이 되고 싶었던 꿈이, 프로듀서로서 다른 아이츄들을 키우고 성장시켜 아이돌을 만드는 걸로."
거짓말.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소중했던 사람을 잃은 상처에 딱지가 생기기 시작할 무렵은 연예계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도망친지 3년이 넘는 시간이 지났을 즈음으로, 연예계에서의 3년이란 공백은 일반 세계에서의 3년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큰 것이었다. 이미 잊혀져버렸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었다. 다시 무대에 서는 것이 두렵기도 했다. 유즈키는 그렇게 소중한 사람뿐만 아니라 소중한 사람과 자신의 꿈마저도 잃었다고 생각했다.
여전히 반쯤은 자포자기한 심정으로 소중한 그의 기일에 그의 납골당을 찾았을 때였다. 가져온 꽃과 그가 좋아하던 화과자를 자리에 두는데 등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랜만이네요, 아사히나 씨."
"...사장님."
"오늘 여기에 오면 당신을 만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날은 그렇게 그녀의 안부를 묻고 연락처를 받아가는 것으로 끝이었다. 하지만 사장은 종종 연락을 해왔고 연예계 생활에 대한 그녀의 의견을 물었다. 이제와서 돌아가기 어렵지 않겠냐는 그녀의 말에 그는 다른 어떤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알겠다고 답했었다. 그로부터 약 2주 뒤, 유즈키는 사장으로부터 만나자는 연락을 받았다. 그리고서 받은 것이 프로듀서로 전향하는 것에 대한 제안이었다. 그녀가 란슬롯, 다른 2기생 그룹인 리베르세르크, 그리고 코코로에 대한 정보 파일도 받았던 것도 그때였다. 후에 제안을 승낙하고 나자 일은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아이츄 활동을 접은지 오래였기 때문에 유즈키는 다시 춤과 노래, 그리고 연기를 공부했다. 그리고 건네 받은 파일의 2기생들이 이전에 불렀던 노래라거나 찍었던 잡지화보들을 몇 번이고 돌려보며 그들에 대해 공부하고 연구했다.
다시 아이돌을 목표로 하기엔 자신이 너무 나이를 먹었다는 것을 유즈키는 잘 알았다. 연예계에서 여자 아이돌의 수명은 굉장히 짧다. 귀엽고 발랄한 어린 여자 아이돌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누가 나이를 먹은 여자 아이돌을 거들떠 보겠는가.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프로듀서 라는 일에 눈을 돌린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프로듀서로서의 활동을 준비하던 기간 동안, 그녀는 꼭 좋은 프로듀서가 되겠다고 다짐했었다. 분명 처음 꿨던 꿈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후배 아이츄들이 아이돌이라는 꿈에 가 닿을 수 있도록 전력으로 돕는, 그런 좋은 프로듀서가 되고 싶어졌다. 너무나 좋은 프로듀서를 둬 말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도움을 받았었고, 그 존재를 잃었을 때 세계가 한 차례 무너졌었던 자신이라면 다른 어느 누구보다 프로듀서의 중요성과 소중함을 잘 아니까.
"..."
"..."
옆 자리의 후타미와 그의 맞은 편에 앉아있는 타카미치가 유즈키의 말을 곱씹기라도 하듯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는데 잇세이가 굳게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금 열었다.
"좋아. 그럼 네가 말한 그 바뀐 꿈대로 우리를 세계 제일의 아이돌로 만들어라."
처음 그녀를 돌아봤을 때의 날카로움이 사라진 한층 더 부드러워진 시선에 그녀는 작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번에도 중도 포기하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 유즈키. 산젠인의 이름을 걸고 말야."
"좋아, 좋아~ 윳쨩이 우리가 톱 아이돌이 되게 도와줘. 그럼 우리가 윳쨩이 이루지 못한 꿈, 대신 이뤄줄게. 귀찮긴 하지만 어쩔 수 없네~"
울컥, 가슴 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올라왔다. 란슬롯 세 사람을 만나기 위해 문 앞에서 떨고 있을 때도 나지 않았던 눈물이 어쩐지 지금이라도 당장 터져나올 것만 같았다. 일시에 뜨거워진 눈가에 유즈키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들 앞에서 꼴사납게 울고 싶지 않았다.
".......앞으로 잘 부탁해! 꼭, 톱 아이돌이 될 수 있도록 프로듀서로서 있는 힘껏 서포트할게!"
"아, 드디어 웃었다."
조금 옆에 떨어져 앉아있던 후타미가 키에 걸맞게 길다란 팔을 뻗어 유즈키의 머리카락 끝을 잡고 빙글빙글 돌리며 웃었다. 옛날과는 다르게 지금의 그에게선 묘한 섹시함이 느껴졌다. 그런 그의 말을 시작으로 다른 둘도 입을 뗐다.
"유즈키, 아까 잇세이가 말했던 거 잊지 않았지? 도망쳐봐야 소용 없으니까 얌전히 우릴 톱 아이돌로 만들라고. 우리 옆에서 말야."
"오우, 그래. 어디 기대해보지. 실망시키지 마라, 프로듀서."
이제 아이돌을 목표로 하던 소녀와 각기 다른 꿈을 품고 있던 소년들은 더 이상 없었다. 하지만 그 대신, 아이돌을 목표로 하는 세 남자와 그들을 톱 아이돌로 만드는 꿈을 품게 된 한 여자가 마주 보며 웃고 있었다. 닫혀진 방문 밖에서 안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제법 큰 키의 남성이 한시름 덜었다는 듯 안도의 한숨을 내쉬곤 작게 혼잣말을 했다.
"그럼 이제 다시 한 번 함께 앞으로 나아가죠, 아사히나 씨."
어쩌면 앞으로 아무리 많은 시간이 흘러도 소중했던 사람을 잃었던 그 충격과 그로 인한 상처는 흉터가 사라지지 않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다시 또 같은 자리가 터져 그때처럼 다시 또 피를 쏟아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이 자리에서 이들과 함께 지내다 보면 분명 언젠간 딱지가 저절로 떼어지고 새 살이 돋아날 것이라는 믿음이 아사히나 유즈키, 그녀 안에 강하게 자리 잡았다.
저물어가는 봄의 공기가 이토록 포근하다는 것을 5년 만에 다시금 느끼며 유즈키는 오랜만에 진심으로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