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타미×유즈키]
사과빛 립스틱
W. 소담(@kimiga_iru)
"...그러니까 이번엔..."
아, 처음 보는 색이네. 최근엔 분명, 코랄색이던가? 그 색을 자주 바르더니. 새로 산 건가?
"...후타미군, 듣고 있어?"
"윳쨩, 립스틱 새로 샀어?"
"아아, 응. 저번에 새로 나온다는 소식 들었을 때부터 갖고 싶었던 색상이거든. 내 립스틱 색깔은 됐고, 그러니까, 어디서부터 안 들은 거야?"
금방이라도 의자에서 흘러내릴 것처럼 앉아있던 후타미는 자세를 바로 한 다음, 책상에 양 팔을 얹고는 그 위에 얼굴을 기댄 채 유즈키를 올려다봤다. 그녀가 새로 샀다는 립스틱의 색이 싱그러운 빨강색이어서일까? 후타미는 그녀의 입술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아, 이거... 뭔가 위험한데.'
머릿속에서 울리는 경고음에 후타미는 다시 자세를 고쳐 창틀에 한쪽 팔을 올리고는 창 밖을 쳐다보았다. 귀에 들려오는 이제는 익숙한 목소리에 창 밖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분명 어렸던 그 때에 보았던 풍경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면서도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아~ 이렇게 윳쨩이랑 둘이 교실에 있으니까 고등학생 때 생각나는 걸~"
"........................아카바네군?"
"네, 네!"
이번에야 말로 위험해! 예쁘게 올라간 입 꼬리와는 다르게 전혀 내려가지 않은 눈꼬리에 후타미는 책상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그녀의 심기가 매우 불편하다는 것을 직감했다. 냉큼 자세를 고쳐앉은 후타미는 정면을 응시하여 그녀를 바라보았다. 자신을 제대로 쳐다보는 그에게 안심한 것인지 그녀는 다시 고개를 숙이고 종이에 사각사각 무언가를 적으며 말을 이어갔다.
"이번이 마지막 설명이야. 그러니까 제대로 들어야 해, 후타미군. A완구 회사 알지? 그곳에서 이번에 B동물원과 콜라보를 진행한다나 봐."
"응, 응."
벌어졌다, 오므려졌다. 벌어졌다, 오므려졌다. 쉴새 없이 움직이는 입술은 기분 좋은 소리를 만들어냈다. 귀로는 그녀의 말을 들으며 후타미는 눈으로 그녀의 입술의 움직임을 쫓았다. 반짝반짝. 잘 익은 사과처럼 탐스러운 빨간색의 입술이 촉촉하게 빛났다.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 움직임이 마치 자신을 유혹하는 것만 같다고 후타미는 생각했다.
어디에 눈을 둬야 할까.
"그래서 그곳의 인기 있는 동물들을 인형으로 만든다는데 A에서 후타미군을 모델로 쓰고 싶다나 봐."
"응, 응."
그녀가 열심히 전하고 있는 말들을 완전히 흘려 듣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동물원과의 콜라보로 란슬롯의 다른 친구들을 빼고 혼자서 모델 일을 하게 되었다, 가 지금 그녀가 하는 말의 요지. 그거라면 이미 파악했다.
"하아...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얘기에 집중을 못 하는 거야, 후타미군?"
작은 입술이 길게 한숨을 내뱉으며 얼굴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의 예쁜 얼굴은 짜증과 화가 대신 그에 대한 걱정이 잔뜩 드리워져 있었다. 불쑥 가까워진 거리에 후타미는 잠시 숨을 멈췄다. 진정해야해, 하는 생각을 머리로 하면서, 의자에 앉아있던 그가 몸을 살짝 일으켜 제법 근처까지 다가와있던 그녀를 향해 몸을 기울였다.
'쪽'
아주 찰나였다. 지근거리에 있는 두 사람에게나 들릴 법한 입술과 입술이 맞닿는 소리. 빠르게 그녀의 입술로 돌진했던 것과는 다르게 입맞춤 후에 후타미는 그녀의 얼굴에서 멀지 않은 곳에서 자신의 동작을 멈추고선 옅게 한숨을 흘렸다. 그녀의 탐스럽게 익은 사과 같은 색의 입술과는 다르게 풋내가 나는 키스였다. 그런데 어째서 중학생 때 했던 서로의 혀를 쫓고 쫓았던 키스보다도 25살에 하는, 그저 입술과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는 키스가 더 가슴을 방망이질 하는 걸까? 후타미는 그녀의 뒷통수를 가볍게 잡고 있던 손을 힘없이 떨어트렸다.
'망했네...'
어정쩡한 자세로 선 후타미는 당황하여 굳어있는 유즈키의 얼굴을 살피며 속으로 생각했다. 약 9년간 줄곧 모른 채 해왔던 감정이 충동적인 행동 하나로 모두 수포로 돌아가게 되었다. 굼뜨고 행동하고 가끔 멍청하게 굴긴 하지만 후타미는 주변의 분위기를 아주 잘 읽는 편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지만 어쩌면 그것은 그의 유일한 특기에 가까웠다. 단지 자신이 읽은 공기를 내색하는 것은 때때로 매우 귀찮은 일을 불러일으켰으므로 그는 일부러 자신이 알아챈 것을 모른 채 하곤 했다. 예를 들자면 같은 그룹에서 활동 중인 두 친구가 고교시절부터 같은 사람을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 같은 것. 타카미치가 유즈키를 좋아한다는 것, 잇세이가 유즈키를 좋아한다는 것을 아는 체 해서 무엇 하겠는가? 각자 다른 이유로 조금씩 외롭게 지내온 사람들이 거의 처음으로 마음을 열고 좋아하게 된 상대이다. 결국 선택은 그녀의 몫이라고 할지라도, 과연 선택 받지 못한 사람은 쉽게 포기할 수 있을까? 관계가 껄끄러워지는 것은 싫다. 소중하기 때문에 더더욱 싫었다. 그래서 후타미 자신도 몽글몽글 하게 피어나는 감정에서 애써 눈을 돌렸었다. 친구들의 짝사랑도 모르는 척, 그리고 자기 자신의 짝사랑도 그저 우정일 뿐이라고 포장하며 고개를 끄덕여왔다. 하지만 그 모든 9년 간의 노력이 이제 수포로 돌아갔다.
".....무슨...?"
평소에도 크고 동그랗던 눈이 당황스러움을 담고 더욱 그 크기를 키운 채 자신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놀란 듯 다물어지지 않은 입술이 아직까지도 탐스러워 보여 후타미는 그녀의 눈과 눈 사이로 시선을 돌렸다. 순진한 얼굴을 한 채 상황에 대한 설명을 찾는 그녀의 모습에 후타미는 아주 작게 웃었다. 자신의 일은 물론이고 주변 사람의 일까지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게 잘 처리하는 그녀는 어째서 이렇게 순진한 소동물의 얼굴을 하고 있을까?
"그건....... 윳쨩의 입술이 사과 같아서 나도 모르게 그만~"
"엣!"
생각지 못한 답이었는지 그녀가 독특한 소리를 냈다. 그녀는 어째서 우정 뒤에 숨겨진 마음들을 보지 못하는 걸까? 후타미는 그렇게 생각하며 짧게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는 아무렇지 않은 듯 웃으며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훑었다.
"에이~ 맛도 사과 맛이었다면 좋을 텐데~ 다음에는 사과 맛으로 부탁해 윳쨩!"
"읏, 바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사과 맛이 있어도 절대 후타미군에겐 안 줄 거거든!"
반듯한 눈썹의 끝이 살짝 위로 향했다. 그 가지런한 각도를 보며 후타미는 속으로 웃었다. 시끄럽게 화를 내고는 있지만 사실 그녀는 화가 났다기보다는 당황스럽고 부끄러워 짐짓 더 화가 난 채를 하는 것이리라.
"네, 네~ 윳쨩~ 나 배고픈데 밥 사주라~"
"저번 주에 사줬잖아. 안돼."
"에이~ 그럼 오늘은 내가 살게~ 어때? 일 얘기는 밥 먹으며 이어서~"
후타미는 마치 둘 사이에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처럼 능청스럽게 그녀의 어깨를 붙잡아 문 쪽으로 향했다. 급하게 자신의 가방을 낚아 들고서 그녀는 그에게 떠밀려 교실을 나섰다. 여전히 그녀의 두 귀는 빨갰지만 그녀의 얼굴에서 당황스런 감정은 사라져있었다. 후타미는 그녀의 얼굴을 슬쩍 내려다보며 자조적으로 웃었다. 그녀에 대한 마음을 어딘가에 잘 감춰왔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무의식적으로 키스해버릴 만큼 전혀 감춰지지 않았던 것이다. 앞으로 어떻게 하면 좋을까 후타미는 고민했다. 소중하게 생각하는 관계가 변하는 것은 후타미에게 있어서 병아리가 자신의 세계를 깨고 나오는 것처럼 무섭고 두려운 일이었다.
"....읏.. 후타미군 잠시만 허리 좀 숙여봐."
고개를 살짝 돌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던 유즈키의 말에 후타미는 허리를 살짝 숙여 그녀와 눈높이를 맞췄다.
"이렇게?"
불쑥 그녀의 손이 그의 입에 닿았다.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입술 한쪽을 문질렀다. 후타미는 자기도 모르게 다시 한 번 숨에 찬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저기, 어, 그러니까, 립...립스틱이 묻어 있어서...."
애써 눈을 돌렸던 마음이 빠르게 형태를 만들어나갔다. 후타미는 자기자신에게 이제 더 이상 아무 일도 없는 척 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아, 이거 진짜로 위험하게 됐네.'
역을 출발해 한 번 달리기 시작한 열차는 종착점에 다다르기 전까지 분명 멈추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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