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W. 소담(@kimiga_iru)

 

 

 



 

 

 

"있잖아, 안즈."

 

 스튜디오 한쪽으로 밀려나 있는 사각형 모양 테이블의 의자에 앉아 이미 프린트된 기획서를 연필로 고쳐나가던 안즈는 자신을 부르는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고개를 들어 자신을 부른 장본인이  누워있는 소파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졸업을 앞둬 유닛 활동을 끝낸 나이츠 전용 스튜디오는 이제는 그야말로 유닛 멤버들끼리 잡담하며 놀고 쉬기 위한 장소였다. 마치 자기 집이라도 되는 양 무척이나 편안하게 모로 누운 리츠가 특유의 게슴츠레하게 뜬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는 대답 대신 마주친 눈을 피하지 않고 가만히 쳐다보며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왜 안즈한테선 셋쨩의 냄새가 안 나?"

"아아아아아아!!! 리츠 쨩~!!!"

 

 리츠가 하는 말은 후반부 가서는 그가 무엇을 물으려는 것인지 깨달은 아라시의 새된 소리에 가로막혔지만, 안타깝게도 안즈가 그 말을 알아듣기엔 충분했다. 그녀는 찰싹 소리가 나도록 리츠의 등을 때리는 아라시를 보며 대답 대신 곤란한 듯 미소 지었다.

 

"아야야.... 낫쨩... 아프잖아~ 으으...."

"그런 걸 묻는 건 실례야, 리츠 쨩."

"그치만 그렇잖아? 두 사람, 셋쨩이 졸업하고부터 줄곧 사귀고 있는데도 말이지, 나 안즈한테서 셋쨩의 냄새 맡아본 적이 없다고? 오히려 나나 낫쨩, ~쨩이나 다른 애들 냄새라면 모를까. 이상하지 않아~?"

 

 정말로 궁금한지 고개까지 한 쪽으로 갸웃거리며 쳐다보는 리츠에게 안즈가 달리 해줄 말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녀 자신도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안즈는 작년 3월에 있었던 졸업식날을 기점으로 이즈미와 사귀기 시작했다. 사회에 나간 그는 일단 그가 학교에 입학하기 전부터 하던 모델 쪽으로 돌아가 본격적인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는 모델 일로, 안즈는 프로듀스 일로 바빴지만 둘은 틈틈히 연락을 주고 받고 만나며 관계를 이어갔다. 입이 여전히 험한 그였지만 그는 그녀가 묻지 않아도 자신의 스케줄을 알려준다거나 본인의 일이 끝나고 제법 늦은 시간에 불쑥 찾아와 영양제 같은 것을 주고 가기도 했다. 안즈가 남몰래 짝사랑 하던 때 상상했던 '남자친구로서의 세나 이즈미'에 비해서는 더할 나위 없이 다정하고 잘 챙겨주는 좋은 남자친구였다. 하지만 그뿐이었다. 사귄지 1년이 다 되어가지만 키스는 커녕 제대로 된 포옹이나 손도 잡아보질 못했다. 그러니 사쿠마 리츠가 그녀에게서 세나 이즈미의 냄새를 맡아낸다면 그게 오히려 놀라울 지경이었다.

 

 '그거 나야말로 궁금하니까 혹시 알면 나한테도 좀 알려줄래?' 라는 말을 목구멍 속으로 꾹꾹 눌러 담으며 안즈는 다시 한 번 곤란한 듯 팔자 눈썹을 하고 미소 지었다. 그 후에 기획서로 다시 눈을 돌린 안즈는 리츠와 아라시에게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시간은 빨리 흘렀다. 아이돌과의 3학년들은 유닛 활동을 종료한 채 졸업 전의 여유를 즐기는 동안, 유일한 프로듀서과의 학생이었던 안즈는 졸업을 앞둔 상황에서도 새학기가 시작 거의 직후에 열리는 진급한 2, 3학년의 신입생을 위한 무대의 기획으로 바빴다.

 

 졸업식 날 교실에서 지루한 이사장의 연설을 들으며 앉아있는데 뒷좌석의 이사라 마오가 그녀의 등을 톡톡 가볍게 쳐서 그녀를 불렀다.

 

"졸업식 후에 졸업생들끼리 저녁 먹고 술 마시기로 한 거, 갈 거지?"

 

  졸업식 날이고 하니 마침 오프라던 이즈미를 만나러 갈까 생각하고 있던 안즈는 살짝 얼굴을 찌푸리며 고민했다. 그러자 마오의 옆 쪽에서 아케호시 스바루가 마오의 팔을 붙잡고 붕붕 흔들며 그녀에게 함께 가자고 졸랐다. 안즈는 알겠다고 대답한 후 핸드폰을 꺼내 이즈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오늘 졸업자들끼리 술자리를 갖게 될 것 같아요.

 

 그가 오프이자 그녀의 졸업식인 오늘, 둘 중 어느 누구도 만나자고 얘기한 적이 없었다. 이미 정해져 있던 약속이 아니었기에 안즈는 '선배네 집에 가려고 했는데'라는 말을 빼고 보냈다. 이즈미로부터 답 메시지를 받은 것은 이사장의 지루한 훈화를 다 듣고 강당을 나와 그 동안 프로듀스 일을 해줬던 후배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꽃다발을 받고 난 후였다.

 

「알겠어. 자기 주량도 모르는 주제에 너무 많이 마시지 말고.

 

 과연 이 사람은 모처럼의 오프 날에 여자친구인 자신을 만나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은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안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추가적으로 다른 메시지가 올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마음에 계속 핸드폰을 들여다봤지만 핸드폰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결국 그녀는 핸드폰을 교복 재킷에 집어넣고는 다른 친구들이 있는 쪽으로 향했다.

 

 

 

 그 동안 친하고 안 친하고를 떠나서 금년의 졸업자들(주로 안즈가 친했던 학생들이지만)이 다 함께 모인 술집은 떠들썩했다. 졸업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졸업 후에는 무엇을 할 건지 얘기하기도 했고, , 불과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소속되어 있던 학교에서의 생활의 추억을 되짚기도 했다. 왁자지껄 떠드는 여러 무리들 중 어느 한 곳에도 끼지 않은 채 안즈는 홀짝 홀짝 혼자 맥주를 마셨다. 처음 마셔본 맥주는 쓰고 맛이 없었음에도 어쩐지 자꾸 들이키게 됐다.

 

"정말로 죄송합니다만, 도련님의 호출이라 저는 이만 일어나봐야 할 것 같습니다. 여기 계신 모든 분들이 앞으로도 무탈하게 각자의 길을 걸어나가시길, 이 후시미 유즈루 진심을 다해 바라겠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만 실례하겠습니다."

 

 자신의 졸업식 날까지도 주인인 토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던 유즈루가 핸드폰을 들여다 본 후에 한숨을 쉬더니 주섬주섬 짐을 챙겨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즈는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가냐며 그녀를 잡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안즈는 '약속이 있어서' 하고 거절했다. 그러자 다들 납득했는지 조심해서 가라며 내일도 만날 것처럼 그녀에게 인사를 건넸다. 안즈는 그들의 그런 인사가 좋았다. 그래서 그녀 역시 이 자리가 그들이 모이는 마지막이 아닌 것처럼 가볍게 인사를 건네고 술집을 나왔다. 술기운 때문에 뜨끈해진 볼을 아직은 서늘한 3월의 밤공기가 어루만졌다. 술집 한쪽에 놔뒀던 꽃다발들을 한 가득 안고서 안즈는 하늘을 올려다봤다. 이즈미의 오피스텔로 갈까도 싶었지만 그에게서 만나자는 얘기가 없었기 때문에 망설여지기도 했고, 어쩐지 자존심이 상하기도 했다. 그는 분명 단순히 선후배 관계였던 때에 비해 그녀에게 잘 해주고 있었지만, 그녀에게 지금의 두 사람의 관계는 마치 선후배 이상 연인 미만의 관계처럼 느껴졌다.

 

 결국 안즈는 그대로 집으로 향했다. 꽃을 방에 전부 장식하기에는 양이 많아 일부 꽃다발을 부엌의 식탁에 올려두고 방으로 향했다. 가방을 바닥 한 쪽에 내려두고 침대에 풀썩 누웠다. 당장 어제까지도 바쁘게 다 일을 했었기 때문에 자신이 이제 졸업해서 더 이상 고등학생이 아니라는  사실이 실감나질 않았다. 그녀는 교복을 벗어 내일도 입고 나갈 사람처럼 옷걸이에 걸어 벽에 걸어뒀다. 가지런히 걸린 교복을 보며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안즈는 씻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다.

 

 자기엔 조금 이른 시간이었지만 그냥 씻고 잘 생각으로 샤워를 하던 안즈는 샴푸를 씻어내다가 계획을 바꿔 이즈미에게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마 제법 오른 술기운 탓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렇게 해가 다 저문 밤이 되어서야 그의 집에 찾아간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으니까. 결심을 굳힌 안즈는 머리를 말리고 적당히 옷을 챙겨 입었다. 그리고는 방에서 과제를 하고 있던 남동생에게 '나갔다 올게. 오늘 안 들어 와.' 라는 말을 남긴 채 집을 나와 서둘러 택시를 잡아 탔다.

 

 

 

 

"안즈?"

 

 안즈가 이런 늦은 시간에 찾아올 것이라고 생각지 못했는지 이즈미는 평소보다 크게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고 있었다. 여전히 현관문을 연 채로 멀거니 서서 눈을 끔뻑거릴 뿐인 그를 살짝 뒤로 밀어내며 안즈는 그의 집으로 밀고 들어갔다. 그는 조금 당황하면서도 밀고 들어오려는 그녀가 편히 들어가도록 몸을 한쪽으로 비켜줬다.

 

 양 볼을 술기운으로 붉게 물들인 채 술 냄새를 풍기는 그녀를 위해 이즈미는 컵에 시원한 물을 따라와 건넸다.

 

"이 시간엔 어쩐 일이야? 졸업자 모임을 벌써 파한 거야? 집에 안 가고 왜 여길 왔어?"

 

 보고 싶었다는 말을 내심 기대했건만, 도리어 왜 왔냐는 말이 들려오자 안즈는 기분이 상했다. 들고 있던 물을 벌컥벌컥 마신 후 안즈는 술 때문에 풀린 눈을 부릅 뜨고는 이즈미를 노려봤다.

 

"선배."

"?"

"우리 사귀는 사이 맞죠?"

"하아? -전 짜증나. 제정신? 그럼 1년 동안 뭐였다고 생각하는데?"

 

 안즈는 컵을 앞 쪽에 위치한 직사각형의 낮은 테이블 위에 올려두고는 미간을 찡그린 채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그를 응시했다.

 

"...손도 안 잡아주고... 포옹도 키스도......... 전혀 연인 사이의 그런 게, 없었잖아요."

 

 안즈는 웅얼웅얼 자신이 쭈욱 가지고 있던 불만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들려오는 건 이즈미의 나지막한 한숨 뿐이었다. 안 그래도 그에게 이래저래 서운했던 안즈에게 그것은 마치 촉매제와 같았다. 안즈는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스스로 생각해도 놀랍도록 대범해서 조금 부끄러웠지만 어쩐지 오늘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이건 분명 술기운 때문일 것이라고 안즈는 생각했다. 그녀는 약간의 거리를 둔 채 앉아있는 그를 향해 몸을 뻗었다. 그는 그녀가 갑자기 가까이 다가오자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이즈미 선배."

 

 안즈는 그의 이름을 부르고는 자신의 두 손에 약간의 힘을 주어 그의 어깨를 뒤로 밀었다. 무방비한 상태였던 그는 그녀가 민대로 뒤로 넘어가 소파에 누운 형상이 되었다. 그러자 그녀는 그에게 올라타듯 그에게 한 걸음 더 다가갔다.

 

"헤에..."

 

 잠시 놀란 눈을 하고 있던 그는 자신의 얼굴 위로 보이는 그녀의 얼굴이 재밌다는 듯 소리 냈다.

 

"지금 뭐 하려는 거, 안즈?"

 

 그를 직접 밀어 넘어뜨리고도 떨려 죽을 것 같은 그녀와 달리, 분하게도 그는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분명 그는 그녀의 밑에 깔려 있음에도 마치 그가 그녀의 위에 올라타있는 것 같았다.

 

"이제 어쩌려고?"

 

 빙글빙글 웃으며 그가 물었다. 안즈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 시키려 애썼다. 이제껏 몇 번이고 머릿속에서 돌렸던 시뮬레이션이었다. 물론 그 시뮬레이션은 그녀가 이렇게 덮치듯 올라타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안즈는 무작정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 댔다. 말랑하고 생각보다도 더 따뜻했다. 그런데, 호기롭게 입술을 맞춘 것은 좋았지만 가벼운 입맞춤에서 조금 더 깊은 키스로 어떻게 나아가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친구와 언젠간 하게 되겠거니 하는 마음으로 키스 하는 법에 대해 여러 차례 찾아봤었지만 막상 직접 해보니 영상의 그 무엇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굳은 채로 어찌할 줄 몰라 하며 눈을 이러 저리 굴리며 그저 입술만 맞대고 있는 안즈를 지근 거리에서 바라보던 이즈미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입술에서 자신의 입술을 떼었다.

 

"애송이 주제에 건방지게. 자기가 하고서 패닉 하는 건 또 뭐야? -전 짜증나. 기껏 배려해준 사람 마음은 전~혀 몰라주고. 진짜 완~전 짜증난다니까."

 

 입술은 떨어져 있음에도 코는 맞닿을 듯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의 눈을 응시하며 그렇게 말한 이즈미는 '읏챠'하고 가볍게 소리를 내며 그녀와 자신의 몸을 반전시켰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이즈미의 위에 올라타 있다가 순식간에 그의 밑에 깔려버린 안즈는 당황하여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래서, 설마 아침까지 계속 입술만 맞대고 있을 생각은 아니지?"

 

 안즈, 그리고 내일 오후 늦게야 스케줄이 있는 이즈미에게는 아직 밤은 많이 남아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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