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이는 글에서 게임에서처럼 할아버지의 말투를 사용하거나 오레이 말투를 사용하지 않습니다(사용하는 것이 나오지 않습니다).
일본의 마녀집회 해시태그의 유행을 보고 작성하게 된 글입니다.
따라서 안즈는 20대 아가씨의 모습을 한 나이가 굉장히 많은 마녀이며 레이는 나이 어린 소년~ 20대 중반의 청년입니다.
탈고를 하지 않아 오탈자가 있을 수 있습니다.
마녀가 꿈꾸던 낙원
W. 소담(@kimiga_iru)
"어째서... 어째서 네가..."
산 너머의 옆 동네 마을 쪽에서 들려오는 소란에 망설이다가 결국 자신의 힘을 써 옆동네의 마을로 향했던 안즈는 자신이 본 광경에 할 말을 잃고 멍하니 중얼거렸다.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춰 지난 2년 동안 소식을 듣지 못했던 바로 그 아이가 눈앞에 있었다, 경멸 받고 미움 받고 그녀 자신이 그들의 공포의 대상이었음에도 그녀가 사랑해 마지않던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든 채.
"오랜만이네, 안즈."
"......레이."
널브러진 시체들을 쌓아 만든 더미 위에 앉아 불 타는 마을을 지켜보던 레이가 그녀의 목소리에 미소를 지으며 돌아봤다. 아름다운 얼굴, 아무리 2살 더 먹었다곤 해도 믿기지 않은 색기어린 미소. 모두가 그녀가 그리워하던 그였지만 그가 아니었다.
**
"안녕."
"........."
"난 안즈라고 해. 넌?"
"........."
"어라... 말을 못하니? 아니면 혹시 이름이 없니?"
"........."
"왜?"
"...마녀......"
꼬질꼬질하게 흙투성이의 아이가 처음 입을 열어 말한 말에 안즈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응, 맞아. 난 안즈라고 해."
안즈는 자신을 공포와 적대감이 가득한 눈으로 노려보는 아이에게 따뜻하게 웃어보였다.
"혼자니? 혼자면 나랑 같이 살래? 잡아먹지 않을게."
**
"안즈! 안즈!"
"......어?"
커다란 바위 위에 앉아 널찍한 땅을 향해 손가락을 튕기고 손을 이쪽저쪽으로 손을 움직이던 안즈가 그제야 레이가 부르는 것을 눈치챈듯 고개를 돌렸다.
"또 숲의 꽃밭을 가꾸고 있던 거야? 점심도 안 먹고 뭐하는 거야."
"응, 그치만 하다 보니까."
미소 짓는 그녀를 보며 레이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치 그녀의 손 움직임으로 인해 방금 전에 꽃씨가 뿌려진 땅이 파일 것 같은 한숨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안즈의 이런 노력을 알아주지도 않는데 뭐하러 이런데 마력을 낭비하는 거야? 사람이 좋은 것도 정도가 있지."
찡그리진 않았지만 아름다운 얼굴을 굳힌 채 불만을 투덜거리는 그의 말에 그녀는 소리내어 웃었다.
"후후. 하지만 난 그냥 사람이 아닌 걸."
"그 말이 아니잖아, 안즈."
"난 말야, 레이. 마을 사람들에게 낙원을 선물하고 싶어. 모두가 반짝반짝 웃으며 행복할 수 있는... 그런 낙원 말야."
"바보 같아. 그 사람들이 알아줄 것 같아?"
"알아주지 않으면 어때. 내 마법으로나마 사람들이 웃게 되고, 행복해진다면 난 그걸로 족해. 아주 오래 전 선조 마녀들이 저지른 잘못을 조금씩이나마 갚아나가고 싶어. 그러다 보면...... 언젠간 사람들도 내 진심을 알아주고 나에게도 웃어주지 않을까?"
"......바보같아."
안즈를 처음 봤을 때 레이는 그녀가 무서웠고 그녀가 싫었다. 갓난아기 때부터 마녀는 사악하고 무섭고 잔인한 존재들이라고 얘기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겐 당연한 일이었다. 더군다나 최근에 있었던 부모님의 죽음도 그가 원래 살던 마을의 일부 사람들은 마녀의 소행이라고 했었기 때문에 누가 봐도 수상한 옷을 입고 있는 그녀가 마녀란 걸 알았을 때 레이는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공포와 증오를 느꼈다. 그런 공포와 증오에도 그녀와 함께 살기 위해 따라나선 것은 언젠가 덩치가 어른이 되면 그녀를 죽이고 싶어서였다. 분명 그것을 그녀도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함께 지내며 알게 된 그녀는 마녀가 맞나 의심이 될 정도로 착하고 순수했다. 부정적인 감정들만을 꽁꽁 안고 있는 어린아이의 마음을 금세 녹일 정도로.
**
"레이... 대체 왜..."
"사람들은 말이지, 안즈. 늘 입버릇처럼 얘기해. 마녀는 사악하다고. 마녀는 인간의 적이라고. 마녀를 조심하고 마녀를 죽여야 한다고 말야."
안즈는 이 처참한 상황에서 농염하다 못해 유혹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얘기하고 있는 레이를 보며 살짝 몸을 떨었다. 그녀가 알던 소년, 청년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안즈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잇던 레이는 발에 힘을 꾹 줘 자신이 딛고 있던 죽은 인간의 목을 짓눌러 부쉈다.
"......레이..."
"하지만... 나쁜 건 인간이었어, 안즈. 나쁜 건 언제나 우리 인간들이었어."
레이의 얼굴에 드리워져 있던 미소가 한 순간에 걷혔다. 서늘하고 냉담해 보이기까지 한, 함께 산 15년 동안 본 적 없는 눈이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난 옛날에 우리 부모님을 죽인 게 마녀라고 생각했어.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했거든. 우리 부모님은 마녀에게 끔찍하게 살해된 거라고... 그러니까 마녀를 미워해야 한다고. 안즈. 난 정말 그런 줄 알고 10년을 넘게 살았어. 너를 가족...처럼 생각하면서도 그럼에도 마녀에 대한 증오를 완전히 지울 수가 없었어. 근데... 근데 사실 우리 부모님은 마녀가 아니라 마을 주민 몇에게 살해당한 거래."
"그걸 네가 어떻게... 어떻게 안 거야?"
"......역시, 안즈는 알고 있었구나. 근데 왜 마녀들의 짓이 아니라고 하지 않은 거야?"
"이미 일어난 일이니까... 같은 사람에게 분노를 갖는 것보단 차라리...... 우리 마녀들에게 그런 감정을 갖는 편이 낫다고 생각했어."
"틀렸어, 안즈. 난 널 완전히 받아들이기 전에 많이 힘들었어. 내가 알게 되고 함께 살게 된 마녀인 넌 전혀 사악하지 않았으니까. 너와 함께 살며 내가 사악함을 느낀 대상은 언제나 인간들이었어."
말을 멈춘 레이는 자신이 목을 밟아 몸통에서 떨어져 나간 인간의 머리통을 아무런 감정 없어 보이는 얼굴로 툭 쳐서 한쪽으로 굴려보냈다. 머리통을 따라 이동하던 안즈의 시선은 머리통이 움직임을 멈추고 나서야 다시 레이에게도 돌아갔다.
"안즈. 넌 모두가 반짝반짝 웃으며 행복할 수 있다면 그걸로 괜찮다고 했었지. 미움 받아도 된다고 말야. 근데 안즈. 애초에 잘못은 인간에게 있었어. 역사상 유명한 그 마녀들이 인간들을 죽였던 사건. 그 사건은 인간들의 마녀들의 힘을 이용해 도움을 받곤 마녀들을 사악한 무리로 몰아 학살했기 때문이었어. 선조의 잘못에 대해 용서를 빌어야 했던 건 애초에 마녀인 네가 아니라 나같은 인간들이었던 거야."
몰랐던 사실이었고 놀라운 얘기들이었지만 현재 눈앞에 벌어진 마을의 처참한 광경 때문인지 안즈는 크게 놀라지 않았다. 그의 말에 '그렇구나' 정도의 감상을 속으로 생각하며 안즈는 그를 다시 바라봤다.
"......안즈. 안즈... 인간에 의해 부모를 잃고 속아 넘어가 마녀를 증오하던 나를 거둬 키워준, 인간을 사랑하는 바보 같은 마녀. 나의 엄마였고, 나의 누이였고, 나의 친구였고, 내가 사랑하던..., 인간들에게 낙원을 만들어주고자 했던 마녀..."
약간 애수에 찬 것처럼 촉촉해 보이는 눈동자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하며 레이는 시체더미에서 몸을 일으켜 그녀 쪽으로 다가갔다. 자신이 아무런 말없이 떠나던 때보다 푸석해 보이고 길이도 좀 더 길어 보이는 그녀의 머리카락 끝부분을 레이는 하프를 연주하듯 부드러운 손길로 쓸어내렸다.
"넌 그럼에도 사람들을 원망하고 미워하지 않을 거란 거 알아, 안즈. 넌 그런 사람이니까. 그래서 난 화가 나. 분명 마을 사람들도 네가 이런 마녀라는 걸 모르지 않았을 텐데도 그들은 너와 내 터전을...... 그렇게 만들었으니까."
"레이... 더 이상은 안돼..."
"넌 언젠간 마을 사람들이 네 마음을 알아줄지도 모른다고 했지만...... 아니. 아닐 거야, 안즈. 인간은 지독하게 사악하고 이기적이거든. 그러니까 그때도 네 힘이 필요할 땐 울며불며 도움을 간청하고선 상황이 나아지니 그렇게 우리의 집에 불을 질렀던 거야. 네가 바라는 건 인간들의 즐겁게 웃는 얼굴과 행복이겠지만 그들은 필요할 때마다 널 이용하고 필요가 없을 땐 돌팔매질을 할 거야. 난 그런 인간들을 용서할 수가 없어."
"그만둬, 레이. 그래도 이렇게 한 마을을 몰살하는 건... 마을을 건들지 마, 제발..."
"미안, 안즈. 그건 들어줄 수 없어. 내가 어떤 마음으로 다른 마녀와 계약해 힘을 얻었을 것 같아? ......아직 우리들의 마을이 남았어, 안즈. 그러니까 이제 난 가봐야 해."
안즈보다 더 강한 힘을 가진 마녀와 계약을 한 것인지 말을 끝마친 레이는 보라색 연기와 함께 사라졌다. 살아 있는 생명체는 자신뿐인 주변을 안즈는 황망하게 둘러 보곤 서둘러 그를 쫓아 그들이 살던 마을의 민가로 향했다.
**
분명 레이와 그리 큰 시간 차이 없이 도착했음에도 마을은 이미 아비규환이었고, 사람들의 비명과 활활 타오르는 불길, 매캐한 연기가 마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사방으로 도망가는 사람들 중 일부를 웃으며 붙잡아 잔인하게 죽이는 레이의 모습이 안즈의 눈에 들어왔다.
"레이!"
"마, 마녀님...! 마녀님 제발 저흴 살려주세요. 저 악마... 저 마왕을 제발 죽여주세요... 제발 저흴 살려주세요..."
레이를 부르며 그를 붙잡아 행동을 저지하려던 안즈는 예상치 못하게 덥석 자신의 팔과 다리를 붙잡고 늘어지는 마을 사람들의 행동에 깜짝 놀랐다.
"저기 어..."
"제발 도와주세요... 제발......"
**
싸움은 치열했지만 승패가 나는 데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이제 살았다며 환호하며 기뻐하는 사람들의 틈바구니에 섞이지 않고 안즈는 자신의 공격으로 피를 흘리며 쓰러져 있는 레이에게 비척비척 다가갔다. 치열했던 만큼 그녀 역시 많은 부상을 입은 상태였다. 주저앉듯 털썩 그의 옆에 앉아 안즈는 그의 얼굴을 더듬어 만지며 울었다.
"왜... 왜 내가 널 죽이게 만드는 거니... 왜... 나에게도 넌 가족이었는데...."
인간들은 이기적이고 사악한 만큼 상황을 빠르게 받아들이고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살아남은 마을의 사람들은 불타버린 집을 다시 고치거나 새로 지었다. 그들은 자기들을 구해준 고마운 마녀에게 마을로 내려와 함께 살자고 했다. 하지만 마녀는 괜찮다고 고개를 흔들곤 악마가 됐던 인간의 사체를 가지고 사라졌다. 그녀의 집으로 갔을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했지만, 그 날 이후로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인간을 사랑해 인간들에게 반짝거리는 웃음이 가득한 낙원을 만들어주고자 했던 그 마녀를 본 이가 없었다.
작중에서 레이는 마을 사람들을 학살 할 때 그들에게 오레이의 말투로 말을 했습니다.
마을 사람이 레이를 '악마'와 '마왕'이라고 표현한 것은 레이 그 자신이 그렇게 표현했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레이가 학살한 마을은 마을 주민이 모두 죽었으며 그 마을은 레이가 태어나고 8살 때까지 살았던 마을입니다.
안즈는 일을 할 때 언제나 즐거운 색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스위치나 다른 아이돌 유닛의 무대를 볼 때면 아주 아주 즐겁고 행복한 색을 하고 있어서 소라도 더 신나고 즐거워져버립니다! 소라는 안즈의 즐겁고 행복한 색이 정말로 좋습니다♪
스승은 소라와 함께 게임을 할 때면 즐거운 색을 하고 있습니다! 선배와 함께 일 때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을 때가 많지만 사실은 즐거운 색을 하고 있을 때가 종종 있습니다♪ 스승은 정말 귀엽습니다! 소라는 스승의 즐거운 색도 정말로 좋습니다!
그리고 사실 이것은 비밀이지만, 안즈와 스승은 둘이 함께 있을 때 즐겁고 행복한 색을 하고 있습니다. 안즈가 라이브를 볼 때나 스승이 소라나 다른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와는 다른 『행복한 색』입니다. 뭔가 따뜻함이 느껴지는 『행복한 색』입니다. 선배에게 두 사람의 따뜻하고 행복한 색에 대해 물었습니다. 선배는 그것은 두 사람이 서로 좋아하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웃으며 말하는 선배는 굉장히 따뜻한 색을 하고 있지만 안즈와 스승과는 다른 따뜻한 색입니다. 어째서일까요~?
안즈는 소라를 좋아해줍니다! 소라를 볼 때면 즐거운 색을 하고 있어서 소라는 알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안즈가 소라를 볼 때의 색은 스승을 볼 때의 색과 다릅니다. 소라는 그 색이 정말로 예쁘다고 생각하지만 어쩐지............ 소라도 안즈를 아주 좋아합니다. 안즈와 함께 있을 때의 소라는 어떤 색을 하고 있을까요? 그리고 지금 소라는 어떤 색을 하고 있을까요? 소라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소라는 알 수 있습니다. 함께 있는 안즈와 스승을 보는 소라는 선배처럼 따뜻하고 행복한 색을 하고 있을 겁니다! 왜냐하면 소라는 안즈도 스승도 정말 정말 좋고 소라는 착한 아이이기 때문입니다! 안즈와 스승을 보는 소라는 따뜻하고 행복한 색일 겁니다♪
"뭐, 일단은 이별이지만. 조금도, 우울해할 필요는 없어. 멋진 미인이 되어줘, 안즈쨩. 그러면 나, 다시 만났을 때야말로 진심으로 구애할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예능계에서 다시 만나자. 그럼 안녕, 안즈쨩. 아하하☆ 그래그래, 그 미소! 그 미소를 나 꽤 진심으로 좋아했어, 다녀오겠습니다~......♬"
조금 많이 낯간지러운 말을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하는 카오루의 눈은 어쩐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반짝였다고 안즈는 기억했다. 그렇다면 그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자신의 얼굴은 어땠더라? 안즈는 그때를 다시 떠올려봤지만 역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 자신의 얼굴 표정이라거나는. 떠올리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때 자기의 양쪽 귀가 라면을 넣기 직전의 끓는 물처럼 뜨거웠다는 것만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 카오루가 자신과 거리를 좁히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좁히고 싶어하는 안즈 자신과의 거리는 선후배로서라거나 아이돌과 프로듀서로서가 아니었다. 사실 안즈는 이 문제에 대해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까지 했었다. "어째서, 저랑 거리를 좁히고 싶어 하세요?"라고. 하지만 꽤나 고민 끝에 했던 그 질문에 그는 "네가 정말로 귀여운 여자애니까~,로는 안돼?"라고 대답했다. 안된다. 그의 대답은 그녀에게 전혀 대답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귀여운 여자아이여서라니. 아무리 안즈 자신이 자기의 얼굴에 후한 점수를 준다고 하더라도 특출난 미인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가 여태껏 만나온 많은 여자아이들 중에 자신 정도의 외모의 사람이 전혀 없었을까? 아니면 그는 그때마다 자기에게처럼 거리를 좁히고 싶어 했을까? 여분의 베개를 껴안은 채 안즈는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그의 말을 깊게 받아들이진 말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보지만 그럼에도 자꾸 그때의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건 분명 그때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여서였다고, 안즈는 변명했다.
"두 번째 단추... 이미 다른 여자아이가 받았겠지...?"
천장을 바라본 채로 무심코 내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 안즈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본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 중에 졸업생의 교복 마이의 두 번째 단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미쳤어 미쳤어..."
안즈는 자신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카오루의 교복 마이의 두 번째 단추를 떠올렸단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베개로 잠시간 얼굴을 눌러덮고 있다가 다시 내려 품에 꼬옥 껴안은 안즈는 다음날 카오루를 어떤 얼굴로 봐야할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걱정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던 탓에 반례제 날엔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이미 약 한 달쯤 전부터 반례제 이후의 언데드와 홍월, 그리고 유성대의 카나타는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예능계에서 다시 만나자」 같은 소리를 듣고서 불과 며칠만에 다시 만나야 한다니, 정말 최악이다. 나름대로 오빠처럼 믿고 따르는 선배와 귀여워 하는 후배의 말버릇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정말 짜증나... 완전 죽고 싶어..."
어안이 벙벙하단 말은 분명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당연하게도 애슬레틱 에리어 홍보를 위한 촬영현장에서 카오루와 마주쳤다. 그런데 그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거절 당할 각오로 고백한 이후로는 처음이지?"라고 말했다. 내가 거절했던가? 아니 그보다 선배가 제대로 고백을 하긴 했던가? 안즈는 눈알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 때문에 인상을 찌푸려버린 탓인지 카오루는 완전히 오해를 한듯 "재회했을 때 진심으로 구애하겠다고 해놓고, 아직 예능계에 들어가려는 단계이고. 안즈쨩도 역시 곤란하지?"라고 말했다. 역시 반례제 때의 그 말들은 평소의 그가 하는 시시껄렁한 작업 멘트였던 걸까. 안즈는 실망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어째서? 스스로 반문하며 안즈는 왠지 상한 자신의 기분을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 카오루에게 전했다.
"맞아요. 곤란해요."
안즈의 대답에 카오루는 그가 곤란할 때 종종 짓는 표정으로 웃었다. 반칙이야, 하고 안즈는 생각했다. 왜 가슴 한 켠이 저릿한지 안즈는 알 수 없었다. 그러한 감정이나 느낌이 무엇인지 모를만큼 안즈는 어리지 않았지만 어째서 이런 감정과 기분이 드는 상대가 그인 것인지가 그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학 와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를 피해다니고, 그가 늘 가볍게 하는 차 마시거나 데이트 하자는 권유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해왔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안즈는 때마침 나타나 준 레이에게 감사했다. 갑자기 나타나 말 건 그 덕에 카오루의 시선이 그녀를 떠나 그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엉망일 지금의 얼굴을 그에게 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의 상태를 살피며 그와 잡담을 나누던 카오루는 대화가 끝나자 잊지 않고 안즈를 불러, 자기 옆에 앉을 정도론 서로의 거리를 좁혔지 않느냐며 그녀를 자신의 옆에 앉혔다. 카오루가 손짓하는대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안즈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진심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가벼운 구애인지 알 수 없어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무 그늘에 레이와 쿠로, 그리고 카오루와 앉아 언데드와 홍월의 다른 멤버들이 고군분투 하는 것을 지켜보던 안즈에게 카오루는 종종 말을 걸어왔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중요하지 않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뿐이었지만 안즈는 다른 여느 때보다 카오루와 눈을 맞추고 그 얘기를 들으며 때때로 반응해줬다. 전엔 분명 이런 상황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어쩐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카오루가 하는 말을 반쯤은 흘려들으며 안즈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언데드라는 인기 유닛의 양대 간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아...... 난 선배가 처음부터...'
레이의 옆 쪽에서 말을 걸어온 쿠로를 향해 몸을 돌린 카오루의 등을 바라보며 안즈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그토록 부담스러웠던 이유.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가 쭉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껄끄럽고 부담스러웠던 이유. 깨닫고 보니 여태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모두 해결되는 듯 했다. 왜 이런 중요한 걸 이제서야 깨달은 걸까. 뒤늦게 후회해봐야 그는 이미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도, 그로부터 예의 그 가벼운 데이트 권유를 받는 것도 이젠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봄에 전학 와 만나서 다시 봄에 졸업생인 그와 이렇게 멀어지는 것이다. 그가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이제 안즈는 더 이상 학교의 유일한 프로듀서가 아니게 될테고, 무엇보다 이제 그는 학교의 아이돌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학교 유일의 프로듀서이자 여학생이라는 특수성은 이제 안즈에게서 사라지는 것이다. 어쩐지 눈이 시큰 거리기 시작했다. 안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곤 천천히 숨을 뱉어냈다. 당장의 눈물은 참아냈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간 정말로 꼴사납게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안즈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코가 일행에게 음료를 가져다주러 가겠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도망쳤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프로듀서인 안즈 역시 놀러온 것이 아니었기에 애슬레틱 에리어 체험에 참여한 멤버들의 음료수와 땀을 닦을 수건을 챙기랴 목장에서 스태프들을 도와 동물들을 데리고 나오랴 정신이 없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촬영에 참여했던 멤버들이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 역 앞에 모였을 땐 이미 하늘이 단풍잎처럼 붉게 물들고 있을 때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안즈는 흘긋 카오루를 쳐다봤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오루는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는 레이에게 졸업 후의 활동과 관련해 상담하고 싶다며 이만 해산하자고 했다.
'멍청이... 선배 바보!'
따로이 인사없이 레이와 무언가를 얘기하며 가는 카오루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반례제 때 그가 했던 말들은 역시나 평소의 가벼운 구애 같은 것이었단 게 실감이 났다. 집이었다면 침대에 뛰어들어 엉엉 울기라도 할 테지만, 아는 사람들과 함께 밖에 있는 지금은 그럴수도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카오루가 멀어져갔다. 깨닫자마자 이대로 끝이구나. 안즈는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태 거절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데이트를 가지 않겠냐, 차를 마시러 가지 않겠냐 권유하던 카오루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계속 거절 당하면서도 계속 웃으며 권유할 수 있었던 걸까? 안즈 자신은 다음에 또 보자는 말조차 입에서 꺼내기가 힘들었는데.
'그렇구나. 농담이었더라도 이런 건, 엄청 용기가 필요한 거구나.'
진지하지 않은 권유더라도 늘 거절하는 상대에게 매번 같은 권유를 하는 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란 걸 여태 생각하지 못했다. 늘 웃는 얼굴로 장난처럼 말해오던 그도 사실은 꽤나 많은 용기를 내고 있었을 것이란 걸, 정말 너무도 늦게 깨달아버렸다. 용기.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늘 먼저 한 발자국 다가와줬던 그에게 이번에야 말로 안즈가 먼저 한 발을 내딛을 차례인지도 모른다.
"미안! 나 잠깐 갔다올게!"
마음이 급해 어디를 다녀오겠다는 건지도 말하지 않은 채 안즈는 카오루와 레이가 간 방향으로 내달렸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어야 할텐데. 안즈의 마음이 급했다. 이쪽 저쪽 살피며 뛰기를 몇 분. 안즈는 마침내 낯익은 청자켓을 발견했다. 다리가 긴 두 사람이었기에, 만약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걷지 않았다면 아마도 안즈는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청자켓에 가까워질수록 안즈의 심장이 쿵쾅쿵쾅 심하게 뛰었다. 이 엄청난 심장박동이 그녀가 달렸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안즈는 잘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달리면 된다. 아주 조금만.
"카오루 선배!"
그에게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안즈는 저도 모르게 카오루의 이름을 불렀다. 꽤 많은 인파 속이었지만 그들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인지 카오루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선배!"
마침내 그의 바로 뒤까지 온 안즈는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신체접촉에 카오루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렇게나 뛰어와서 붙잡아놓고선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리도 없고, 그걸 듣고 "그래?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사람도 없을 테니까.
"안즈쨩?"
급하게 뛰어와 자신을 붙잡은 안즈가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있자 걱정되는지 카오루가 몸을 굽혀 안즈와 시선을 맞췄다. 회색빛이 도는 옅은 갈색의 눈이 걱정스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젠 정말로 거부 당할 것을 각오하고 말을 꺼낼 때였다. 안즈는 쥐고 있던 카오루의 옷소매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머,멋진 미인이 되면 그땐, 그땐 정말로......"
"......구애할게. 사실 어느 때부터인가는 항상 진심이었지만. 그땐 정말 그 어느때보다 더 진심으로, 구애할게."
처음엔 안즈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눈을 깜빡이며 안즈를 쳐다보고 있던 카오루는 이내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사람에게서 완전히 존재가 잊혀져버린 레이는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재미난 구경을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시청자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3학년 유일의 프로듀서와 연예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졸업생이 사귀고 있단 소문이 교내의 아이돌들과 프로듀서들에게 퍼진 것은, 벚꽃이 막 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누군가 사람은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개인들이 모인 상황에선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순 없는 법이다.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주인공이면 또다른 누군가는 조연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윳쨩."
"응?"
어딘가 들떠보이는 얼굴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수업 때 쓸 자료를 미리 꺼내 정리하는 유즈키에게 묻자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행동에 자각이 없었던 건지 짧게 되물으며 이쪽을 돌아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단 눈이었다.
"콧노래 말이야, 콧노래~"
"콧노래? 내가 콧노래 불렀어? 미안. 시끄러웠지?"
이제야 자신이 무의식 중이 한 행동을 깨달은 그녀는 무안한지 귀 옆의 뺨을 검지 손가락으로 긁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표현이었지만 어쩐지 유즈키에겐 잘 어울렸다.
"딱히 시끄럽다거나 한 건 아닌데. 윳쨩의 목소리, 예쁘니까."
그렇게 얘기하자 예상대로 유즈키는 쑥스러운 듯 소리내 웃더니 다시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말을 의식한 듯 한 동안 조용하던 그녀는 얼마 못가서 다시 소리내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얼마나 들떠있는지 모른 척 하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윳쨔앙~ 초콜릿은?"
"...! 어떻게 알았어? 초콜릿은 수업 끝나고 다 같이 저녁 먹을 때 줄게."
초콜릿은 안 주냐고 보채는 말을 예상하지 못한 건지 유즈키는 날 신기한 걸 바라보는 눈으로 쳐다봤다. 모를리가. 이렇게나 네게서 초콜릿 향이 진동하는데.
일반적으로 여주인공과 이루어지는 것은 남자 주인공의 특권이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선택을 받지 못한 남자 등장인물은 자연히 조연의 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남자 주인공과 조연은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등장인물들이 모르고 있을 뿐.
수업 후 넷이서 식사를 하러 온 곳은 발렌타인 데이의 달콤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중식당이었다. 각자 취향껏 음식을 시키고서 언제나처럼 떠드는데 주섬주섬 유즈키가 무언가를 꺼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예상하고 있은 그것, 초콜릿이었다. 유즈키는 유치원의 아이들에게 간식을 배분해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을 초콜릿을 나눠줬다.
"자 이건 타카미치 군 꺼, 이건 후타미 군 꺼... 그리고 이건 잇세이 군 꺼!"
그녀는 알고 있을까, 마지막에 가서 한톤 높아진 자신의 목소리를?
"해피 발렌타인! 열심히 만들어 봤으니까 맛은 그냥 넘어가 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듯 우리를 번갈아 봤다. 채근에 못 이긴 척 입 안에 집어넣은 초콜릿 한 알은 냄새만큼이나 달콤했다.
"어때?"
그렇게 물으며 유즈키는 어느 한 쪽을 바라봤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녀의 몸은 솔직하게 그녀에게 가장 중요할 대답을 해줄 사람을 향해 틀어진다. 강한 인상의 그가 피식 웃으며 맛있다고 하면 비로소 그녀는 안심한듯 숨을 길게 내쉰다.
주인공에게는 주인공의 역할, 조연에게는 조연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주인공들의 사이의 갈등을 극대화 시켜 결국에는 의도와 다르게 그들의 사이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조연과 그들의 곁에서 한결같이 그들을 응원하고 도와주는 조연. 그리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과의 우정도, 조연의 이루지 못하는 사랑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조연1은 남자 주인공의 초콜릿이 더 잘 만들어진 것 같다며 혹시 그게 진심이 담긴 초코 아니냐며 두 사람 사이를 바람 잡아주며 하나 남은 초콜릿을 마저 입에 털어넣었다. 달고 씁쓸한 맛이 났다.
* 보컬로이드 곡인 <Acute>와 <React>의 가사를 바탕으로 각색하여 쓰여진 연성입니다.
* 내용을 짤 때 けったろ(켓타로) & Φ串Φ(쿠시) & ベェェェェジュ(베쥬), 세 분이 부른 Acute -Reverse-를 참고했습니다.
[리츠안즈레이/리츠안즈이즈]
돌이킬 수 없는 < 1 >
W. 소담(@kimiga_iru)
땅거미가 안개처럼 내려앉은 학교는 대부분의 학생이 하교를 한 탓에 낮 시간대의 시끌벅적함을 상상하기 어려울 만큼 적막했다. 언뜻 보면 아무도 없는 것같이 고요한 스튜디오엔 천장에 설치된 온풍기가 작동하는 소리와 연필의 사각거리는 소리만이 어렴풋이 들려올 뿐이었다.
"...안즈."
적막을 깬 것은 소리를 낸지 한참은 된 것처럼 평소보다 낮게 가라앉은 리츠의 목소리였다. 리츠는 깨어난 그를 눈치채지 못한 채 오로지 기획서에만 눈길을 주고 있는 안즈를 한참을 멍하니 쳐다보다 그녀의 온기를 찾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검은 글씨가 빼곡할 하얀 종이에만 머물던 시선이 그를 마주하자 그는 여전히 누운 채로 몸을 움직여 그녀의 무릎에 자신의 머리를 얹었다.
"무릎베개..~"
"응."
조금 전까지만 해도 버릇처럼 미간을 찡그리고 있던 얼굴에 그녀의 이름을 닮은 미소가 피어났다. 리츠는 가만히 그것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려 그녀의 품으로 파고들며 어리광을 부리듯 말했다.
"안즈가, 형님이랑 친한 거...... 싫어. 기분 나빠."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그 말은 혼잣말이라 하기엔 너무 컸다. 마치 그녀가 듣길 바라는 것처럼.
"하지만 난 모두를 돕는 게 일인 프로듀서니까."
"응...... 알고 있어."
리츠는 굳이 쳐다보지 않아도 그녀가 곤란한 듯 잔뜩 처진 눈으로 어색하게 웃고 있을 것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그가 그의 형인 레이와 안즈가 가까이 지내는 것을 질투할 때면 늘 그녀가 짓는 표정이었다. 마치 그녀가 "어쩔 수 없는 걸" 하고 말하는 것 같아서 리츠는 그녀의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녀가 형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리츠는, 안즈는 나만 바라보면 돼, 라는 말을 침과 함께 꼴깍 삼켰다. 조금 씁쓸한 맛이 느껴지는 건 자꾸만 일그러져 가는 이 마음 때문이리라. 리츠는 눈을 꼭 감고 끌어안은 그녀의 체취를 깊게 들이마셨다. 그녀의 달콤한 체취에 흐릿하게 낯설지 않은 체취가 났다. 이 불쾌한 잡내없이, 안즈의 달콤한 체취 전부가 나만을 위해 있다면... 리츠는 조금 더 안즈를 바짝 끌어안았다.
안즈는 자신의 품에 고개를 파묻은 리츠를 내려다봤다. 그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그녀로선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자신의 허리를 더 꽉 끌어안는 그의 행동에 상상만 할 뿐. 안즈는 몇 개월 전부터의 갈수록 악화되어가는 이 상황이 버거웠다. 그녀는 교내의 아이돌들 중 몇몇이 자신을 친구나 선후배 이상의 눈으로 바라보는 것을 언젠가부터 눈치채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입장에 충실하고 싶었기에 그 감정들을 눈치채지 못한 척 해왔다. 모든 걸 받아주는 듯 하면서도 정작 연심은 눈치 못 챈 사람처럼 자연스럽게 거절하는 그녀의 태도에 그녀의 거절 의사를 알아챈 대부분의 아이돌들은 어느 순간부터 알아서 좋아하는 내색을 하지 않았다. 사쿠마 형제만 제외 한다면.
형인 레이는 그녀에 대한 호감을 은근슬쩍 드러내곤 했다. 본인이 무언가를 할 때 그녀를 곁에 둔다거나 그녀가 할 일을 할 때 그녀의 곁에 머무는 식으로 그는 그녀에 대한 감정을 내비쳤다. 호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동생인 리츠 쪽이었다. 안즈는 처음엔 그가 자신에게 연애 상대로서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걸 몰랐다. 다른 사람들이 바보 같다고 할지도 모르지만, 그녀로서는 눈치채기가 어려웠다. 그는 그녀에게 마음을 연 후부터는 줄곧 무릎베개를 해달라고 조르거나 피를 달라고 조르는 등, 늘 어리광을 부려왔기 때문이다. 그녀는 그의 마음을 깨달은 후에 그가 자신에게 내비치는 진심을 에둘러 거절했다. 눈치가 제법 좋은 그는 그 완곡한 거절을 빠르게 알아채곤 한 발 물러나 자신이 안즈에 대한 사랑을 깨닫기 전처럼 그녀를 대했다. 적어도 그녀가 레이에게 호감을 갖고 있단 걸 눈치채기 전까진.
안즈는 리츠의 형인 레이에게 선후배 이상의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 감정의 시작이 언제부터 였는진 그녀 자신도 알지 못했다. 호감을 드러내면서도 아슬아슬하게 선을 넘어오지 않는 그의 태도가 그를 더 궁금하게 만들고 그녀를 안달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어쩌면 전부 핑계고 그냥, 그에게 끌렸을지도. 누구라도 돌아볼 것 같은 수려한 외모의 그는 행동 하나하나가 우아하고 무게있는 기품이 넘쳤다. 그럼에도 그는 무대 위에선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언젠가 한 번 무대 아래에서 그가 속한 UNDEAD의 무대를 지켜본 적이 있었다. 그때 마주쳤던 그의 눈빛을 안즈는 아직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평소에도 그의 눈은 묘한 색기를 품고 있었지만 그때 안즈를 바라보던 눈은 욕망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는 것 같은, 그런 눈이었다.
'아가씨를 원해.'
그때 부딪쳤던 그의 시선에서 읽었던 것은 단지 그녀의 착각이었을까, 안즈는 궁금했다. 물론 완전한 착각은 아닐 거라는 건 그녀도 짐작하고 있다. 그럼에도 그녀는 자신이 지키고 싶은 선 때문에 그에게도 일정의 거리를 뒀다. 하지만 그녀의 이런 노력을 아는지 모르는지, 리츠는 안즈가 자신의 형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아챈 이후론 이전보다 훨씬 더,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집착하기 시작했다. 다만, 그만의 룰인지, 안즈에게 직접적으로 레이를 좋아하는지는 묻지 않았다. 그래서 안즈도 굳이 그에게 자신이 누구에게 호감을 갖고 있는지 얘기하지 않았다. 어차피, 적어도 졸업 전까지는 레이와 이 이상의 관계 발전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레이 선배...'
자신을 꽉 끌어안는 리츠를 바라보던 안즈는 가만히 고개를 들어올려 다시 기획서를 쳐다봤다. 마치 안즈가 어디 사라지기라도 할까, 그녀의 허리를 힘껏 끌어안고 있는 것에서 느껴지는 그의 집착과 다리에 느껴지는 그의 무게는,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형인 레이를 떠올리게 했다. 기획서의 그 어느 문장에도 제대로 시선이 머물지 못하고 있던 때 그녀의 고개를 무언가가 옆으로 돌렸다. 갑작스레 뺨에 느껴진 온기에 화들짝 놀라며 정신을 차린 그녀의 눈앞엔 조금 전까지만 해도 그녀의 품에 파고 들던 그의 얼굴이 있었다. 아련하게 흔들리면서도 분노가 엿보이는 눈. 안즈는 위험하다고 느꼈다.
"형님 생각, 그만해. ......지금 같이 있는 건 나잖아."
지금까지완 달리 노골적으로 감정을 드러내는 그의 언동에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은 안즈는 고개를 뒤로 빼려고 했지만 그의 손이 그녀의 뒷머리를 손바닥으로 감싸 그 쪽으로 끌어당겼다. 퇴로가 막힌 그녀에게 그의 얼굴이 더욱 가까이 다가왔다. 그녀는 질끈 눈을 감았고, 바로 다음 순간 그녀의 입술에 그의 입술이 맞닿았다. 짧은 시간 맞댄 채 포개져 있던 입술을 그가 소리없이 떼어냈다. 천천히 감았던 눈을 뜬 안즈의 눈에 들어온 건 지근거리에서 그녀를 응시하고 있는 리츠의 석류처럼 빨간 눈이었다. 안즈는 그와 그녀 사이에 애매하게 끼어있던 자신을 팔을 움직여 그를 밀어내려 했다. 하지만 붉은 빛의 그의 눈엔, 창밖을 까맣게 물든 어둠처럼, 이제 막 족쇄에서 벗어난 욕망이 일렁이고 있었다. 다시 한 번 그의 얼굴이 다가왔다 쪽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다시 그녀에게 키스했다. 안즈는 여태껏 단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그녀가 늘 어른들의 키스라고 생각해왔던, 그런 키스였다.
"나는 너한테만 서툴지, 다른 건 다,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교활하고 능숙해. 그건 네가 안 봤으면 좋겠어."
- 드라마, 밀회 中 -
의자에 앉은 채 에이치에게 자신의 머리를 온전히 맡기고 있던 안즈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등 뒤에 있어 그녀의 얼굴이 안 보이는 것이 분명함에도 어떻게 알았는지 에이치는 그녀의 그 작은 변화까지도 당연한 듯 눈치챘다.
"왜?"
다정한 목소리가 안즈에게 물어왔다. 올라간 입꼬리를 억지로 끌어내리며 위아래 입술을 겹쳐 입을 앙 다물고 있던 안즈는 참아왔던 즐거움을 토해내 듯작게 쿡쿡 거리며 "아니에요." 하고 답했다. 하지만 역시나 늘 그렇듯 "말해 봐." 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그가 그녀를 채근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는 그녀의 작은 것들까지도 전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에 이런 상황의 끝은 늘 안즈가 삼켰던 말을 꺼내는 것으로 마무리 지어지곤 했다. "별 거 아닌데." 하고 운을 뗀 안즈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열심히 그러모으고 있는 그를 살짝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에이치 선배는 뭐든 완벽한데 의외로 이런 사소한 건 서투네요."
그녀가 곱게 휜 눈과 부드러운 음성으로 하는 말이 지적이 아니란 건 파악했지만 그 말의 명확한 뜻을 이해하지 못해 에이치는 그녀에게 되물었다.
"이런?"
"머리 묶기 같은 거요."
안즈의 대답을 들은 에이치는 그녀를 따라 쿡쿡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그치만 난 남자고 머리도 길지 않아서 머리를 묶어볼 일이 좀처럼 없는 걸. 그리고..."
에이치는 뜸을 들이듯 말을 끊은 후, 자신의 손목에 끼고 있던 안즈의 머리끈을 손목 밖으로 끌어내 그녀의 머리를 한 갈래의 포니테일로 묶어주며 말했다.
"안즈. 난 네게만 서툴지, 다른 건 다, 전부... 너도 모르진 않겠지만 아마 네가 알고 있는 것, 네가 상상하고 있는 것보다도 훨씬 더, 그러니까, 네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난, 많이 교활하고 능숙해."
몸을 앞으로 살짝 숙인 것인지 귓가에서 속삭이듯 들려오는 다정한 목소리는 그 이상의 무언가가 녹아 있어서 마치 그녀가 전학 와서 혁명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대면했던 '유메노사키의 황제 텐쇼인 에이치'를 떠올리게 했다. 묘하게 긴장하게 만드는 그 목소리에 안즈는 고개를 돌려 그를 쳐다보려 했으나 그는 그녀가 그럴 것이라는 걸 이미 예상했었는지, 그녀의 관자놀이 부근을 가볍게 잡아 그녀의 머리를 똑바로 고정시켰다.
"안돼, 돌아보지 마 안즈. 그런 모습은, 너만은 보지 않았으면 하니까."
안즈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이 하고 싶었던 말을 목구멍 안쪽으로 꾹 눌러삼켰다. 그녀 역시 그에게만큼은, 그를 만나며 그녀의 안에 어느샌가 싹 튼 검은 마음과 집착에 얼룩진 모습이 아닌, 귀엽고 믿음직하고 사랑스러운 모습만 보이고 싶었기에. 물론 그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테지만.
마침내 모든 것이 끝났다. 시작은 등교 중에
이상한 목소리를 들은 것이었고 그 이후로 낯선 세계로 불려와 ‘쿄’ 라고 하는 곳을 구하기 위해 동분서주해왔다. 원령을 없애고
아크람들과 싸우고 하는 것을 시작한지 꽤 오래되었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지금 돌이켜보면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오히려 짧은
추억과 같은 느낌이었다. 만약 무녀와 팔엽이라는 신분으로 묶여있지 않았다면 과연 이토록 친해지고 정이 들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을 아카네는 종종하곤 했다. 어쩌면 아닐지도 모른다.
마음(心)
W. 소담(@kimiga_iru)
이제 꿈에 그리던 원래 세계로 갈 수
있다. 등굣길에 갑자기 사라져버린 딸을 걱정하고 있을 부모님을 만날 수 있다. 울며 웃으며 자신을 꽉 끌어안을 부모님을 생각하며
아카네의 얼굴엔 저절로 미소가 번졌다. 쿄에 지내면서 자꾸만 생각나던 인스턴트 음식들도 실컷 먹을 수 있을 것이고, 텐마와 시몬과
함께 예전처럼 학교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평범한 일상으로의 귀환인 것이다. 아카네에게 있어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은
무척 중요한 일이고, 평범한 여고생으로 돌아가는 일은 처음 쿄에 왔을 때부터 마음속으로 계속해서 빌던 일이었다.
그런데 왜 이리 마음이 허전한 걸까. 아카네는
오른손을 자신의 왼쪽 가슴께에 올려보았다. 그녀의 심장은 일정한 간격으로 리듬을 그리며 뛰고 있었다. 이제 원래 세계에 가면
당연하지만 후지공주를 볼 수 없다. 지나치게 충성하는 모습으로 종종 자신을 곤란하게 만들던 요리히사도, 늘 불평하면서도 자신을
위해 노력해줬던 이노리도, 꽉 막혔을 것 같은데도 의외의 열정을 보여줬던 타카미치도, 본인의 피리 소리만큼이나 맑고 상냥했던
에이센도, 정신만큼은 두 살배기여서 막 걸음마를 뗀 것처럼 상대를 불안하게 만들 때가 있는 야스아키도, 그리고- 언제나 버팀목과
같았던 다정한 토모마사도. 이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어쩐지 가슴이 답답해.’
가슴께에 올려 진 손으로 옷자락을
움켜쥐고 있는데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아카네는 깜짝 놀라며 서둘러 손을 뗐다. 잠깐의 시간이었는데도 그녀의 손바닥은
옷자락을 땀으로 적셔놓았다. 어느새 아카네에게서 열다섯 발자국쯤 떨어진 곳에는 토모마사가 서 있었다.
“토모마사 씨.”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그는 평소처럼 다정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아카네는 문득 토모마사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가 궁금해졌다.
“이제 곧 원래 세계로 가네요.”
“그렇군.”
“다신…올 수 없는 거네요, 이 곳 쿄에.”
“아무래도 나의 공주님은 이곳의 매력에 깊이 빠져버린 모양이군. 아니면 나의 매력일까-?”
평소처럼 살짝 부끄러워하면서 자신의 이름을 부를 것이라 생각했던 토모마사는 아카네로부터 아무런 반응이 없자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아카네의 표정을 보려했지만 그녀가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이런. 마지막으로 건네는 농담이니 부드럽게 넘어가 줘, 무녀님.”
“그런 게 아니에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아카네는 말을 배운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처럼 더듬더듬 말을 이어나갔다. 토모마사는 그런 그녀를 상체를 살짝 숙인 채로 바라보며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카네는
이미 시작해버린 말을 끝맺지 못하고 계속 같은 말을 되풀이하면서 아까처럼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께를 힘주어 잡았다. 옷자락을
잡았음에도 세찬 고동이 느껴졌다. 발작이 일어난 것처럼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의 의미. 아카네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여태껏
아카네는 토모마사가 짓궂은 농으로 그녀를 희롱할 때면 별다른 느낌없이 그를 그녀 나름으로 질책했었다. 처음에는 자신을 놀리는 게
재미있는 걸까, 하며 원망을 하기도 했지만 언젠가부터 그의 농담에 얼굴이 화끈거리거나 왠지 모르게 들뜨기도 했다. 그렇다.
이것은 아마도 좋아하는 마음일 것이다.
“토모마사 씨, 저는 토모마사 씨를-”
지금이 아니면 고백할 수 없다. 해질녘 무렵에는 원래의 세계로 돌아가게 된다. 그러니까 지금이 아니면…
“아. 나는 이만 가보아야겠어. 끝까지 배웅해주고 싶지만- 그게 나로서는 힘들 것 같달까-.”
“아아 토모마사 씨!”
아카네는 몸을 일으키는 토모마사의
옷자락을 서둘러 붙잡았다. 뒤로 돌던 토모마사는 멈칫 서더니 아카네 쪽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는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이내
손을 뻗어 아카네의 뺨을 시계방향으로 원을 그리며 두어 번 쓰다듬더니 이내 그녀의 귓가 쪽으로 향해, 앞으로 흘러내린 그녀의
옆머리를 귀 뒤로 넘겨주었다.
“무녀님이 하려는 말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어쩐지 듣지 않는 편이 좋겠어. 그대는 어차피 내일이면 이곳에 존재하지 않을 꽃송이니까. 그대의 세계에 가서 평범한 소녀로 살게 된 것을 축하해, 공주님.”
그렇게 말한 토모마사는 아카네의 머리를 몇 번 이고 만지작거리더니 씁쓸한 미소를 지어보이고는 뒤돌아 나갔다. 자신을 계속해서 부르는 아카네를 돌아보지 않은 채.
아카네는 울고 또 울었다. 눈이 퉁퉁 부을지도 모르지만 그런 것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머리는, 배웅을 하러 오지 않겠다고 한 토모마사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했다. 텐마와 시몬이 달래어도 봤지만 아카네의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무녀님 부디 고정하세요-. 소장님은 대체 무슨 생각이신 건지….”
토모마사를 제외한 팔엽들, 후지 공주와
란은 서럽게 우는 아카네의 마음을 풀어줄 방법을 알지 못했다. 타카미치는 이런 때는 울만큼 울고 생각을 정리할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드리자고 제안했다. 그들은 아카네에게 원래 세계로 돌아가는 의식을 시작할 때 모시러 오겠다고 말하고는 모두 물러갔다.
모두가 나간 후에도 훌쩍거리며 아카네는 무릎을
끌어안고 앉았다. 이제껏 알지 못했던 연정(戀情)은 깨닫는 순간 너무나 부풀어버려서 주체할 수가 없었다. 이토록 커버린 마음을
어쩌란 말인가. 여태껏 속삭이듯 말했던 것들은 모두 다른 여자들에게 했던 것처럼 한낱 농이었을까. 아카네는 알고 싶었다,
토모마사의 마음을. 당최 알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늘 여유로운 어른의 본보기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간혹 가다 무척이나
위태로워 보이는 모습을 보여 놀라게 했다.
“토모마사 씨…”
강렬하던 태양의 빛이 조금씩 숨을 고르기
시작하자 후지공주는 아카네의 처소로 향했다. 아쉽게도 이제는 작별이다. 이대로 이 저택에서 머무셔도 좋다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린아이다운 투정을 부리고도 싶었지만, 그녀는 원래의 세계에 그녀만의 생활이 있는 것이다.
“무녀님- 후지입니다만, 이제 나가셔야할 시간입니다.”
문 안에서는 기다리던 답이 들려오지
않았다. 혹시 울다 지쳐 잠이 든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조용히 문을 열어보았다. 아무도 없었다. 쭈그려 앉아있건 엎어져
누워있건 벽에 기대어 잠들어 있건 간에 반드시 그 방에 있어야만 하는 사람이 그 방에 없었다.
“무…무녀님 !!!!!”
멀찍이서 들려오는 후지공주의 비명소리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나지막한 목소리에 토모마사는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뒤로 돌았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았기 때문이다.
“하핫. 내가 이곳으로 올 것이라는 건 어찌 안걸까, 무녀님은.”
“글쎄요. 그냥- 토모마사 씨니까 이곳이 생각났어요.”
토모마사는 아카네를 쳐다보았다가 태연한 척 하면서 고개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품에 쏙 들어올 만큼 작은 체구의 소녀가 흔들리지 않는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에 무녀님이 있으면 곤란해. 봐, 저기 저쪽에서 후지 공주의 비명소리가 들리 잖아.”
“토모마사 씨는 왜 여기 계세요?”
부담스럽다. 토모마사는 차마 소녀의 눈을
쳐다볼 수가 없다. 모토미야 아카네 라는 소녀는 늘 그랬다. 평범한 얼굴의 평범한 소녀. 연약한 소녀일 뿐이지만 때로는 남자
여덟이 꺾을 수 없는 고집을 보이기도 한다. 강한 의지를 담고 있는 맑은 눈동자. 안 된다. 저 눈을 쳐다보면 진심을 말해버릴
것만 같아서 토모마사는 최대한 그녀의 눈동자를 피했다.
“그건, 업무를 보고 오는 길에 이쪽으로 지나가다가 우연히-”
“………겁쟁이”
벌어진 작은 입술에선 그를 질책하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짜’ 자신에게 꼭 들어맞는 그 말에 토모마사는 흠칫 놀랐다. 정확하다. 그녀의 눈은 놀라울 만큼 정확했다.
“토모마사 씨는 구제불능의 겁쟁이네요. 어째서- 어째서 제 마음을 알면서 그러는 거에요? 왜, 어째서 말하지 못하게 하는 거에요?”
“무녀님의 마음이라니-? 나는 야스아키 님이 아니어서 무녀님의 마음 같은 건 알 수가 없어.”
소녀의 눈은 여전히 흔들림이 없었다. 다만 방울방울 눈물이 맺혀있을 뿐이었다. 욱씬, 가슴이 아팠다. 손을 뻗어 눈가에 맺힌 그것을 닦아주고 싶다. 그러나 그래서는 안 된다.
“왜 어른이 이렇게 비겁한 거에요. 좋아하게 만들어놓고서…왜 좋아한다고 말하지도 못하게 해요.”
그 말이 채 끝나기 무섭게 아카네는
울음을 터트렸다. 감정이 복받쳐 올랐는지 숨이 넘어갈 듯이 운다. 아카네의 어깨에서 몇 센티쯤 위, 허공에서 멈칫 멈칫하던
토모마사의 손은 마침내 결심을 굳혔는지 그녀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는 아이를 달래 듯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
“이거 미안하다고 해야 하는 건가. 하지만 말이지, 무녀님. 나는 무녀님이 생각하는 것만큼 좋은 사람이 아니야. 좋은 어른이 아니야.”
본인이 자신에 대해 그런 말을 해야 하는 것이 가슴 아팠지만 그래도 별 수 없다. 순정(純情)에 눈이 가려져 소녀가, 후회할지도 모를 선택을 하려하고 있으니까.
“알아요-.”
어쩐지 충격이다. 물론 토모마사는 지금 이 순간엔 아카네가 자신을 그렇게 봐주길 바라고 있었다지만, 실제로 소녀가 자신을 그렇게 보고 있었다니.
“이거 이거-”
“좋은 사람이 아니라도 좋은 거에요. 나쁜 사람이어도 좋을 거에요. 그냥 토모마사 씨가 좋은 거에요. 거짓말쟁이여도, 겁쟁이여도, 바보에 멍청이 해삼 말미잘 같은 사람이어도 토모마사 씨니까 좋은 거에요.”
“해삼- 말미잘?”
눈물 때문에 유난히 반짝이는 눈동자로
토모마사를 쳐다보며 아카네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선 ‘그런 게 있어요’ 라고 말할 뿐이다. 아카네는 언젠가부터인가 움켜쥐고
있던 토모마사의 소맷자락을 살며시 놓으며 거리를 둔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는 토모마사 씨가 뭘 걱정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아직 제가 어려서 그런 거라고 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지만 음, 사…사랑에는 무모함 같은 것도 필요한 거니까요. 쿄를 떠나시기 곤란하다면 제가 여기에 남을 게요.”
토모마사는 다시 한 번 소녀에 감탄했다.
쉽게 할 수 있는 결정은 분명 아니다. 이번에 원래의 세계로 가는 기회를 놓치면 다시는 영영 갈 수 없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녀가 오래 전부터 그리워했던 그 세계를 다시는 볼 수도 없고, 그 곳에 있을 그녀의 가족도 만날 수가 없다.
“나의 공주님은 좀 더 현명한 사람인 줄 알았는데, 아닌 모양이로군. 분명 그대는 후회하게 될 터인데.”
“토모마사 씨, 저는 장난이 아니에요. 정말 정말로 절박해요.”
“어쩐지 그 말은 나를 비꼬는 것처럼 들리는 군. 무녀님은 그 곳의 가족들이 그립지 않아?”
이제는 눈물이 모두 메말라버린 눈으로 토모마사를 올려다보며 아카네는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그립지 않을 리가 있는가. 머릿속으로 수천 번 수만 번 그려보았던 가족인데.
“그럼 어째서 이렇게 까지 나와 함께 하려 하는 거지?”
“저는 토모마사 씨처럼 머리가 좋지 않아서
제 머리를 속일 수가 없어요. 머리를 굴려가며 누군가를 대할 수 없어요. 후회할지도 모른다고 하셨죠, 토모마사 씨? 토모마사
씨가 제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도록- 저를 꼭 붙잡아 주세요. 숨이 막힐 만큼 꽉 끌어안아주세요. 토모마사 씨를 선택한 것이 옳은
일이었다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알려주세요.”
아무래도 어쩔 수 없는가보다. 31살이니
인생을 꽤나 오래 살아왔다고도 볼 수 있지만, 눈앞의 이상하리만큼 순진한 소녀에게는 당해낼 수가 없다. 어째서일까. 그녀의
눈앞에서는 모든 것을 드러내게 된다. 수많은 여인들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정작 누군가를 사랑해보지 못한 메마른 가슴도, 겁쟁이처럼
자신의 진심을 숨기기에 급급했던 것도 결국엔 그녀에겐 내비치고 만다. 이제 정말로 결단을 내려야할 참이다. 토모마사는 자신의
마음을 알고 있다. 다만 마음이 이끄는 대로 해도 좋은 것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눈앞의 소녀를 좋아하고 있다. 첫 진심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런 것이 남들이 말하는 사랑인가 싶을 정도로 그는 진지하다. 하지만 정말 이래도 되는 것일까, 하는 물음이 그의
머리를 괴롭혔다.
“토모마사 씨-?”
갑자기 생각에 잠겨서 꼼짝하지 않고 있는 토모마사를 아카네는 걱정스레 불렀다. 그 소리에 정신이 들었는지 그는 아카네를 쳐다보았다. 혼란스러워 보이는 표정의 토모마사는 아카네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나는 쿄에 별다른 집착이 없어.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님. 괜찮다면 나를 그대가 보아 온 세상으로 초대해주지 않겠어? 물론 그곳에서도 그대의 순정이 변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서 말이지.”
토모마사와 아카네는 모두가 있는 곳으로
함께 갔다. 모두들 아카네의 가출로 패닉 상태였다. 후지 공주는 울었는지 눈이 붉었다. 모두들 돌아온 아카네를 보고서는 안심했지만
함께 있는 토모마사와 그녀의 사이가 묘해보이자 못마땅해 했다. 특히 텐마는 더더욱.
“토모마사 저 자식은 아주 그냥…. 그래서 두 사람은 어쩔 거야? 아카네도 가는 거지?”
“안타깝게도 나도 함께 동행 하게 되었다네, 텐마.”
토모마사의 한 마디는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에는 충분했다. 모두들 각기 다른 표정으로 그 같은 결정을 반대하고 나섰다.
“사랑스러운 사람이 나고 자란 곳이
궁금하기도 하고, 텐마 자네와 그녀가 함께 있는 건 영 불안해서 말이지. 쿄와 그대들의 세계가 많이 다를지라도, 이 타치바나노
토모마사 정도의 남자라면 자기 여인 하나쯤은 건사할 수 있지 않겠나?”
여행은 끝이 났다. 모두와 울며 이별을
했다. 끝나지 않을 것만 같던 여행이었는데. 현실로 돌아온 아카네는 아직도 몇 시간 전의 일들이 꿈 같이 느껴졌다. 어쩌면
꿈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가 그것들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주고 있었다.
“저희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토모마사 씨. 앞으로도 잘 부탁드려요. 여기의 세계에 대해선 제가 차근차근 알려드릴게요. 절대 다른 사람들에게 배워선 안돼요. 특히 여자들에겐!”
네온사인이 가득한 거리를 걸으며 아카네가 말했다.
“토모마사 씨. 가요, 저희 집에. 엄마랑 아빠가 기다리고 계실 거에요. 실종되었던 딸이 웬 남자를 데리고 나타나면 분명 놀라시겠지만 말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