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사람은 모두 자기 인생의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주인공인 개인들이 모인 상황에선 모두가 주인공이 될 순 없는 법이다. 필연적으로 누군가가 주인공이면 또다른 누군가는 조연이 될 수밖에 없다.
"오늘 기분 좋아 보이네, 윳쨩."
"응?"
어딘가 들떠보이는 얼굴로 콧노래까지 부르며 수업 때 쓸 자료를 미리 꺼내 정리하는 유즈키에게 묻자 그녀는 지금까지 자신이 하고 있던 행동에 자각이 없었던 건지 짧게 되물으며 이쪽을 돌아봤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겠단 눈이었다.
"콧노래 말이야, 콧노래~"
"콧노래? 내가 콧노래 불렀어? 미안. 시끄러웠지?"
이제야 자신이 무의식 중이 한 행동을 깨달은 그녀는 무안한지 귀 옆의 뺨을 검지 손가락으로 긁었다.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표현이었지만 어쩐지 유즈키에겐 잘 어울렸다.
"딱히 시끄럽다거나 한 건 아닌데. 윳쨩의 목소리, 예쁘니까."
그렇게 얘기하자 예상대로 유즈키는 쑥스러운 듯 소리내 웃더니 다시 하던 일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내 말을 의식한 듯 한 동안 조용하던 그녀는 얼마 못가서 다시 소리내어 흥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가 얼마나 들떠있는지 모른 척 하고 싶어도 알 수밖에 없었다.
"윳쨔앙~ 초콜릿은?"
"...! 어떻게 알았어? 초콜릿은 수업 끝나고 다 같이 저녁 먹을 때 줄게."
초콜릿은 안 주냐고 보채는 말을 예상하지 못한 건지 유즈키는 날 신기한 걸 바라보는 눈으로 쳐다봤다. 모를리가. 이렇게나 네게서 초콜릿 향이 진동하는데.
일반적으로 여주인공과 이루어지는 것은 남자 주인공의 특권이다. 그래서 여주인공의 선택을 받지 못한 남자 등장인물은 자연히 조연의 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아니, 어쩌면 처음부터 남자 주인공과 조연은 정해져 있는지도 모른다. 단지 등장인물들이 모르고 있을 뿐.
수업 후 넷이서 식사를 하러 온 곳은 발렌타인 데이의 달콤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먼 평범한 중식당이었다. 각자 취향껏 음식을 시키고서 언제나처럼 떠드는데 주섬주섬 유즈키가 무언가를 꺼냈다. 이 자리의 모두가 예상하고 있은 그것, 초콜릿이었다. 유즈키는 유치원의 아이들에게 간식을 배분해주는 것처럼 우리에게 자신이 직접 만들었을 초콜릿을 나눠줬다.
"자 이건 타카미치 군 꺼, 이건 후타미 군 꺼... 그리고 이건 잇세이 군 꺼!"
그녀는 알고 있을까, 마지막에 가서 한톤 높아진 자신의 목소리를?
"해피 발렌타인! 열심히 만들어 봤으니까 맛은 그냥 넘어가 줘!"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녀는 자신이 만든 초콜릿을 어서 먹으라고 재촉하듯 우리를 번갈아 봤다. 채근에 못 이긴 척 입 안에 집어넣은 초콜릿 한 알은 냄새만큼이나 달콤했다.
"어때?"
그렇게 물으며 유즈키는 어느 한 쪽을 바라봤다. 내색하지 않으려는 그녀의 생각과 달리 그녀의 몸은 솔직하게 그녀에게 가장 중요할 대답을 해줄 사람을 향해 틀어진다. 강한 인상의 그가 피식 웃으며 맛있다고 하면 비로소 그녀는 안심한듯 숨을 길게 내쉰다.
주인공에게는 주인공의 역할, 조연에게는 조연의 역할이 있는 법이다. 주인공들의 사이의 갈등을 극대화 시켜 결국에는 의도와 다르게 그들의 사이를 더욱 공고히 해주는 조연과 그들의 곁에서 한결같이 그들을 응원하고 도와주는 조연. 그리고 나는 후자를 선택했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과의 우정도, 조연의 이루지 못하는 사랑도 유지할 수 있으니까.
조연1은 남자 주인공의 초콜릿이 더 잘 만들어진 것 같다며 혹시 그게 진심이 담긴 초코 아니냐며 두 사람 사이를 바람 잡아주며 하나 남은 초콜릿을 마저 입에 털어넣었다. 달고 씁쓸한 맛이 났다.
중학교 3학년이던 나는 지역의 유명한 사립 중학교를 다니던 모범생이었다. 특별히
머리가 좋았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특별한 목표나
하고 싶거나 좋아하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부모님이 기뻐하시는 공부에 열중했을 뿐이었다. 학교와 학원을
오가며 공부하는, 도수 높은 두꺼운 안경을 쓴 존재감 0의
너드. 이게 당시의 나였다.
우리의
첫만남은 그야말로 운명과도 같았다. 중간고사가 끝났던 어느 일요일의 어느 날, 나는 내 유일한 취미였던 라이브 하우스에 갔었다. 그리고 거기서
너를, 만났다. 그 날은 내가 좋아하는 밴드 이외에도 다른
여러 가수들이 무대에 올랐다. 너도 그 중 하나였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신인 여자 아이돌이라고 소개된 너는 내 또래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꽤나 많은
사람들을 앞에 두고도 너는 떠는 기색 없이 밝게 웃으며 자기를 소개했고 너의 노래를 했다. 귀여운 안무와
네 미소처럼 밝은 그 노래는 단숨에 내 마음을 훔쳤다. 두 곡은 정말이지 너무 금방 끝나버렸다. 무대를 마친 너는 오늘 와줘서 고마웠다며 객석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꾸벅 인사를 했었다. 그래, 그때 분명 너는 나와 눈을 맞추며 태양처럼 웃었지.
운명과도
같았던 너와의 만남은 나의 모든 걸 바꿔놓았다. 나는 모은 돈을 털어서 네 CD들을 사기 시작했고 학교를 빠져가면서 네가 서는 모든 무대들을 보러 다녔다.
너 같이 예쁜 아이에게 어느 학교를 가도 몇 명 쯤 있을 것 같은 두꺼운 알의 안경을 쓴 나 따위는 어울리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운동을 했다. 그래서 벌벌 떨면서도 안경을 벗고 렌즈를 끼는
연습을 했다. 단순히 네 앞의 관객석에 있는 사람 중 한 사람이 아닌,
네 옆에 있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열심히 운동하며 나를 가꿨다. 그러는 사이에
웬일인지 여자아이들에게 많은 고백을 받게 됐지만 나에겐 이미 네가 있었기 때문에 어느 고백도 내 눈과 귀엔 들어오지 않았다. 네가 다니는 행사들에 참여하고 네가 홍보하는 물건들을 하나 하나 모으며 너와의 추억을 쌓았다. 물론 그만큼 성적은 계속 떨어졌고, 부모님께 야단 맞는 날의 연속이었지만
나는 그 어느 때보다 행복했다.
그러던
네가 고등학교에 올라간 후 언젠가부터 네 무대를 보러 오는 교복 입은 남자애들이 있었다. 그 애들은
네가 다니는 학교의 교복을 입고 있었고, 무대를 마치고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너는 그 녀석들과 잘 아는
사이라도 되는 듯 얘기를 나누곤 하는 걸 몇 번이고 보게 됐다. 나는 평소에 너를 보기 위해선 학교가
끝나자마자 서둘러 학교를 나와 네가 다니는 학교가 있는 지역에 가기 위해 전철과 버스를 타야만 했다. 그렇게
서둘렀음에도 너를 볼 수 없는 날도 꽤 많았다. 하지만 너는 내가 온 줄도 모르고 그 같은 학교의 세
녀석들과 나를 지나쳐가곤 했다.
내
존재를 가장 먼저 눈치챈 것은 안타깝게도 네가 아닌 파마머리 놈이었다. 몇 번인가 눈이 마주칠 때마다
그는 알 수 없는 묘한 표정을 지었고 그러다 어느 날인가부터는 다른 두 녀석들도 나를 경계하기 시작했다. 기사들에
보호를 받는 공주님처럼 너만, 너만이 나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했다.
역시
태양 가까이에 다가가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그냥 잘생겨지는 것만으로는 네 곁에 설 자격이
충분치 못했던 것 같았다. 그래서 너에 걸맞게, 나 역시
멋진 아이돌이 되자고 생각했다. 그러면 너와 자연스럽게 얘기도 나누고 함께 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어느 날 태양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태양의 주변을 맴돌던 녀석들도 네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모르는 눈치였다. 다른 귀여운 아이돌들을 가까이서 볼 수 있는 것은 좋았지만 네가 없는데 내가 굳이 계속 아이돌을 해야 하는
것인가 싶었다. 모든 것이 시간 낭비처럼 느껴졌다. 그 시간에
차라리 네 무대 영상을 반복해서 보는 편이 훨씬 나을 거라는 생각에 정말로 그만두려고 했었다. 하지만
그만둔다는 내 말에 곰사장이 들려준 것은 네가 조만간 프로듀서로서 복귀할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때, 새롭게 나는 꿈을 찾았다. 더 이상 네가 빛나는 조명 아래에서 노래하는
것을 들을 수는 없지만, 대신에 네게 길러지는 아이돌이 되면 되는 것이다. 네가 사랑으로 키워내는 너의, 아이돌.....................................
화가
나게도 사장은 너를 금방 만나게 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너와 마주하지도 못한 채 오늘까지 왔다. 가끔은 선글라스와 마스크를 벗고 네 앞에 섰지만 너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네가 나를 지나쳐 가는 방향엔 네가 사랑하는 다른 아이츄들이 있었다. 어째서 네가 웃어주는
것이 내가 아닐까. 하지만 그것도 오늘까지다. 오늘까지.
오늘은
우리가 처음 만난 지 4000일. 그리고 네가 마침내 나의
프로듀서가 되는 날이기도 하다. 우리는 역시 운명이 아닐까, 나의
프로듀서 ♪
옛날
옛날, 피부가 눈처럼 곱고, 눈은 호수를 담아둔 것처럼 깊으며, 입술은 붉은색의 꽃송이를 찍어 눌러놓은 듯 붉은 공주님이 있었습니다. 공주님은
아름다울 뿐 아니라 총명했으며 그 마음씨까지 고왔습니다. 부당한 것을 보면 그냥 지나치지 않고 직접 나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발 벗고 나설 만큼 적극적이었으며, 상대의 마음도 곧잘 헤아려 그녀를 우러러 보는 백성을 세는 것보단 그녀를 좋아하지 않는
백성을 손으로 꼽는 것이 더 빠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공주님은 그녀를 미워하는 악당 때문에 크나큰 곤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악당 때문에 몸도 마음도 크게 상처 입은 공주님의 예쁜 눈에선 보석 같이 반짝이는 눈물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녀를 마음으로 흠모하는 온 백성들이 힘들어하는 공주님을 보며 함께 힘들어 했지요.
시들어가는 꽃처럼 점점 말라가는 공주님이 때문에 국왕 부부와 백성들마저 큰 시름에 잠겼을 때, 짠 하고 나타난
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수려한 외모를 가지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기사다운 용맹함과 지혜로움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슬픔에 잠긴 공주님을 웃게 해드리기 위해 열심히 최선을 다해 악당과 싸웠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세 명의 기사들은 공주님을 멋지게 구해냈습니다. 공주님은
자신을 위해 애써준 기사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고, 기사들은 앞으로도 공주님께 충성할 것을 맹세했습니다.
지혜롭고
다정하며 아름다운 공주님은 왕위에 올라 어진 정치를 펼쳤으며, 세 명의 용맹한 기사들은 그녀의 곁을
지키며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이야기가, 정말로 여기서 끝?? 말도 안돼.
그럴 수는 없는 거잖아???? 이렇게... 이렇게
내가 공주님을 사랑하고 있는데.. 이렇게나 많이 사랑하고 있는데....
어째서 공주님은 나를 봐주지 않는 거야???? 내가 왕궁에서 일하는 미천한 하인이라서 그런
거야?? 어째서야?? 공주님. 나를 봐줘. 내가, 이렇게나 사랑하고 있잖아........?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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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정말로 사랑해요, 공주님.... 제발 그 새끼들이
아니라 나를 봐줘. 공주님에게 진짜 해피 엔딩을 가져다 줄 수 사람은 그 새끼들이 아니라 나야. 나만큼 공주님을 잘 아는 사람은 이 세상에 없다고...? 지금의
해피 엔딩을 부셔버리면... 그 새끼들이 죽으면 나를 봐줄 거야, 나의
사랑스러운 공주님?
세게 쥐면 부서져버리는 그런 소중한 것을 건네듯 너는 두 손으로 내게 그것을 건넸다. 너와 잘 어울리는 여리고 깔끔한 아이보리 빛의 네모진 카드엔 그 속에 적혀 있을 날짜에 아마도 네가 입고 있을 드레스처럼 큼직한 레이스 장식이 달려있었다.
"오- 드디어 나온 거냐? 그보다 이 레이스는 다 뭐야? 정말 네 녀석들다운 청첩장이로군."
잘 올라가지 않는 입꼬리를 애써 끌어올려 네게 웃어보였다. 똑부러진 주제에 의외로 맹한 구석이 있는 너는 내 마음도 모른 채 볼을 복숭아 빛으로 물들이며 수줍게 웃는다. 전직 아이돌답게, 네 미소는 보는 사람 역시 웃게 만드는 힘이 있다. 내가 네 얼굴을 제대로 인식하게 된 것은 분명 벚꽃이 지고 난 후였을 텐데 두 뺨을 발갛게 물들이고 미소 짓는 네게서는 늘 벚꽃향이 난다.
너는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상냥했다. 아무리 좋게 말하려 해도 좋은 인상이라고는 할 수 없는, 정확히 말하자면 무섭게 생긴 나에게도 스스럼 없이 말을 걸만큼 너는 사람이 좋았다. 그래서 처음엔 네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난생 처음 나와 얘기를 나누면서 겁도 내지 않고 멋대로 대화를 진행해나가는 너는 조금은 괴짜 같았고 이상한 여자 같았다.
"알잖아, 사실 나보다는 타카미치 군 취향이라는 거."
"아아, 그렇지. 그 녀석 아닌 척 해도 참..."
나도 레이스 달린 귀여운 옷을 좋아했더라면, 눈물을 쥐어짜고 손발이 오그라드는 연애소설을 좋아했더라면. 그랬다면 네게 내 마음을 전할 수 있었을까. 그랬다면 네가 나를 돌아봐줬을까.
"유즈키. 아, 곧 성이 바뀔 테니 마지막으로 아사히나,라고 불러볼까."
"후후 뭐야 그게."
"아사히나."
"응?"
"결혼, 축하한다. 그 녀석과 너의 행복한 모습을 곁에서 지켜볼 수 있어서, 기쁘다. 행복해라."
반은 진심이고 반은 거짓인 말을 태연함을 가장해 늘어놓는다.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다. 타카미치 녀석도 행복했으면 좋겠다. 하지만 두 사람이 연인으로서, 그리고 부부로서 함께 행복하길 바랐던 것은 아니었다. 그건 정말 아니었다.
봄꽃 같이 미소 짓고 있는 네 입에서 나오는 이름이 내 이름이 아니라는 것이, 네 이름 앞에 올 성이 '토도로키'가 아니라는 것이 입안을 쓰게 한다. 내가 언제부터 내가 이토록 약한 사람이 되었더라. 이게 다 네가 이상한 여자인 탓이지. 이게 전부 네가 봄의 벚꽃 같은 탓이지. 앞으로 더욱 행복해질 너를 보며 가슴이 일렁이는 건 전부 네가 십여 년 전에 나를 똑바로 마주 바라보며 미소 지었던 탓이지. 너는 왜 외로움도 깨닫지 못한 채 잘 살고 있던 내게 쓸데없이 다정함 따위를 알려줬던 걸까. 몰랐다면 아프지 않았을 감정까지 알려준 걸까. 네 미소가, 네 다정함이 아니었다면 마주하지 않아도 됐을 괴로움. 전부 너 때문이다. 전부, 전부 너 때문이다. 최악이다. 아주 최악중의 최악이다. 너를, 네 미소를 만나지 않았다면 지금 이렇게 괴로울 일도 없었을 테지. 하지만... 그럼에도 다행이다, 너의 쓸데없는 다정함을 알 수 있었어서.
평상에 바깥쪽을 바라보도록 원을 그려 앉은 네 사람은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옥상문 바로 위에 달려있는 전구 이외엔 달리 빛을 밝혀줄 만한 것이 없었기에 네 사람은 마치 묵직한 어둠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에~ 유성우는 아직이야~? 언제쯤 떨어지는 거야~"
"시끄럽다, 후타미. 유성우가 '나 떨어지겠습니다' 하고 바로 떨어지는 그런 건 줄 알아? 조용히 기다려보자고."
"계속 올려다보고 있으려니 목 아프단 말이지~ 역시 난 누울래~ 잇세이~ 조금만 옆으로 가줘."
"쳇."
세 사람이 언제나처럼 대화하는 것을 들으면서도 유즈키는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7년... 8년만인가? 이렇게 넷이서 다 같이 유성우 떨어지는 거 보는 거."
문
득 떠오른 것처럼 유즈키가 혼잣말하 듯 나즈막히 말했다. 어깨 뒤로 한 손을 기댄 채로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던 잇세이는 반대편의 손
바로 옆에 두었던 맥주를 집어 목을 축였다. 분명 편의점에서 살 때만 해도 살짝 손이 시릴 정도로 시원했던 맥주가 더운 공기를
머금어 미지근해져 있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8년이지. 고2 때였으니."
"와, 8년이라니. 후후. 그렇게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 멤버 그대로 유성우를 볼 수 있다니. 뭔가 꿈 같은 걸."
타
카미치는 흘끗 옆에 있는 유즈키를 훔쳐봤다. 여전히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는 그녀는 마치 행복한 꿈이라도
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녀에게서 눈을 거둔 그는 자신의 몫으로 사온 츄하이를 꿀꺽꿀꺽 마셨다. 유즈키의
옆얼굴의 잔상처럼 달콤한 과일 맛이 입안에 감돌았다.
"그러고 보니 그땐 다들 무슨 소원 빌었어?"
홀로 상반신을 뒤로 누운 채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던 후타미가 고개를 좀 더 젖히고는 세 사람을 쭈욱 돌아보며 물었다.
"그러는 넌?"
타카미치가 몸을 돌려 후타미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러자 타카미치를 올려다보던 후타미는 베시시 웃으며 당당하게 '비밀~!' 하고 말했다.
"하아? 네가 물어놓고 너는 말을 안 하려고 한 거?"
"에~ 내가 말하면 타카미치 분명 화낼 테니까 비밀~"
"하아?? 어서 말해 후타미!"
둘의 옥신각신 하는 모습을 슬쩍 본 후에 키득대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던 유즈키는 탁탁 하고 누군가를 부르는 것처럼 평상을 손바닥으로 쳤다.
"저기...!"
하
늘을 가리키고 있는 유즈키의 다른 쪽 손을 따라서 나머지 세 사람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나, 그리고 다시 또 하나. 꼬리를 문
것처럼 별이 네 사람의 머리 위 어두운 하늘을 가로지르며 수놓았다. 잠시 감상을 하던 유즈키는 곧 손에 들고 있던 맥주캔을 옆에
내려두고는 두 손을 맞잡았다. 그녀의 행동을 보고는 타카미치도 그녀를 따라 손을 가슴 앞에 맞잡았다. 손을 꽉 잡으면 소원이 더 잘
이루어지기라도 하는 것처럼 그는 있는 힘껏 잡았다. 그러자 후타미는 '소원이 하늘에 더 잘 닿도록!' 같이 쓸데없는 말을 하며
손을 허공으로 쭈욱 뻗은 채 양손을 맞잡았다.
"아? 아주 일어나서 손을 뻗지 그래?"
친
구의 멍청해 보이는 행동이 재밌는지 잇세이는 킥킥대며 다시 하늘을 올려다봤다. 몇 십년만에 가장 많은 유성우를 볼 수 있을 거라는
뉴스대로 8년 전 넷이서 함께 봤었던 때보다 더 많아 보였다. 잇세이는 다른 세 사람과는 달리 양 손을 맞잡고 소원을 빌지
않았다. 그는 꼭 손을 맞잡고 소원을 빌지 않아도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걸 알고 있었다. 8년 전에도 제멋대로의 포즈로 소원을
빌었지만 이렇게 이루어졌으니까. 잇세이는 양팔을 뒤로 뻗어 몸을 뒤로 기울인 채로 수많은 사람들의 각기 다른 소원이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8년 전 네 사람의 소원>
유즈키 - 모두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아이돌이 되게 해주세요.
잇세이 - 이녀석들과 모여서 또 소원을 빌 수 있길.
타카미치 - 무대에서 빛나는 유즈키를 오래오래 볼 수 있게 해줘. 그리고 우리 넷이 계속 함께 할 수 있게 해줘.
후타미 - 우리 네 사람의 소원을 들어줘~!
<이번의 네 사람의 소원>
유즈키 - 모든 아이츄들이 무대에서 빛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프로듀서가 되게 해주세요.
옅은 회색의 침구 위, 아무렇게나 몸을 웅크리고 있던 후타미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한낮의 태양은 방에 걸려있는 커튼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제법 큰 키만큼 큼직한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며 그는 암막 커튼을 살 걸 그랬다며 속으로 남들 앞에선 절대 하지 않을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니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미 점심을 챙겼을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에야 마침내 후타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휘적휘적, 겨우 침대를 벗어난 몸은 곧장 부엌으로 가 혼자 사는 집답게 그리 크지 않은 냉장고로 향했다. 규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그의 냉장고답게 안에는 제대로 된 음식은 거의 없었다. 냉장고 속을 위아래로 두어 차례 훑어본 후에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손을 뻗어 이전에 미리 씻어두었던 사과 하나와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폭신한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은 후타미는 사과를 입에 베어 물고는 익숙한 손동작으로 옆의 원형 탁자 위에 올려둔 맥주 캔을 땄다. '딸깍'하는 소리가 이미 맥주로 입안을 적신 것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목구멍을 톡톡 건드리는 청량감을 주는 맥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후타미가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다. 더운 날씨 탓에 캔의 표면은 이미 물방울이 방울져 있어 캔 뚜껑을 딴 것만으로도 그의 손은 축축해져 있었다. 어차피 다시 축축해질 손을 굳이 추리닝 바지에 문지른 그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목을 뒤로 젖히고서 눈을 감았다.
「후타미 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목소리가 맞던가, 후타미는 가만히 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4년 전의 겨울. 이제 그녀의 목소리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즈키..."
생각만 해도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해주던 이름은 이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괜히 시큰거려오는 눈가를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길게 늘어진 소매로 북북 닦은 후타미는 심만 남은 사과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처음보다 미지근해진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연락 한 번 없기야......?"
4년 묵은 서운함을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입 안이 썼다. 백날 이렇게 혼자 떠들어봐야 소용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와 친구들이 알고 있던 집에서 이사를 가버렸고 핸드폰 번호와 메일 주소마저 모두 바꿔버렸다.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린 그녀를 찾을 방도를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맥주 한 캔을 마시긴 했지만 여전히 정신은 또렷했다. 후타미는 소파 반대편에 구겨진 채 틈에 끼어있는 후드집업을 잡아 빼 입고는 멘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좀 아까까지도 침대에서 누워있던 탓에 평소보다 더 부스스한 머리에 후드 모자를 뒤집어 쓰고는 멘션 뒤편의 벤치에 앉았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아.... 이런...."
반대편 주머니까지도 뒤져봤지만 후드 집업의 주머니 속에 있을 터인 라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던져두었을 때 주머니 속에서 굴러 떨어져버린 것이리라. 한숨을 크게 내쉰 후타미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몸을 웅크렸다. 되는 것이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
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착신음에 후타미는 소리가 나는 곳을 뒤적였다. 핸드폰의 윗면에 작게 나있는 액정에는 둘도 없는 그의 친구 이름이 적혀있었다. 눈꼬리가 처져서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졌음에도 그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얼마 없었다. 원인은 그에게 있었다.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그는 상대가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치곤 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조퇴한 한 친구를 함께 놀던 다른 친구들이 욕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 그가 다른 사람에게 벽을 치는 계기가 됐었다. 울려대는 핸드폰에 적혀진 이름의 주인은 그런 그의 벽을 넘어 벽 안쪽에 자리한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벽의 높이를 낮춘 것은 후타미 그 자신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이유 없이 시비라도 걸게 생긴 그 친구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착하고 정의로웠다. 자신을 무서워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해서 본인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조차 포기한 채, 그저 모두가 무서워하는 존재로 남아 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 모습은 후타미에겐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먼저 안면몰수 하고 다가갔고, 그렇게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훌쩍 사라져버린 유즈키가 떠올랐었기 때문에 별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떠올린 날이면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포장하는 게 어려웠다. 후타미는 친구들에게 이제껏 자신이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연기들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긴 했던 것인지 사실 알 수가 없었다. 같은 문제로 마음 속에 상처를 입은 것은 그 혼자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그들은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더라도 내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러웠던 친구, 아사히나 유즈키의 잠적에 세 사람이 모두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다른 둘은 지금은 멀쩡히 그들의 생활을 하고 있다. 후타미는 저 자신이 유즈키의 잠적을 핑계로 그저 글러먹은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고 있던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끊겼다가 다시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우, 잇세이다. 지금 집이냐?"
토도로키 잇세이. 그는 성격대로 다른 인사 없이 본론부터 얘기했다. 슬리퍼 끝으로 바닥의 흙을 비벼 파며 후타미는 그렇다고 답했다. 옆에서 다른 친구인 산젠인 타카미치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직 해가 강한 이 여름 날의 낮 시간부터 귀찮게 왜 만나려 하는 것인가 싶었다. 오늘은 그들만큼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집이냐고 묻는 것으로 보아 그 둘은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오늘은 귀찮은데~"
"그건 가서 얘기한다. 도망치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먹을 거 사갈 테니까."
"예이~"
전화를 끊은 후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며 후타미는 생각에 잠겼다. 7년을 알아온 사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인 잇세이는 드물게 들떠 있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타카미치의 목소리 또한 신난 듯 했다. 무엇이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는지는 조금 흥미가 돌았다. 후타미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바닥과 침대 위 여기저기 널려있는 옷가지들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났다.
곧 집에 들이닥칠 친구들의 의해 자신이 현재의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그 끝에 오래도록 찾고 기다렸던 아사히나 유즈키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의, 탁자 위에 놓여있는 다 먹은 사과와 빈 맥주 캔을 치우고 있던 후타미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
이것은 조금 먼 기억이다. 정확히 언제의 기억인지는 몇 번이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이 날 이때가 시작점이었다는 것을 그, 아카바네 후타미는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평소 친하게 지내는 잇세이와 타카미치가 각자 다른 사정으로 인해 하교를 함께 할 수 없던 어느 오후, 후타미는 학교에서 제법 떨어진 번화가의 길거리를 방황하고 있었다. 집에 들어가봐야 귀를 따갑게 할 것은 분명 어머니의 잔소리일 것이다. 화도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부모님이 강제시키는 꽃꽂이 수업은 너무나 싫었지만, 그래도 꽃꽂이는 제법 자신 있는 편이었고 스스로 재미있게 할 수 있는 일 중 하나였다.
"아아~ 오늘은 윳쨩도 없고... 심심하네~ 집에 가긴 싫은데~"
서점에 들러 신간 만화책을 뒤적이고 자주 가는 인형가게에 들러 좋아하는 동물 인형 시리즈가 새로 나왔는지 확인을 마치고 나니 할 것이 없었다. 서글서글한 인상과 인상대로의 붙임성 있는 말씨 덕에 초면인 사람들에게도 편한 인상을 주는 편이었지만, 그럼에도 고등학생이 되어 함께 다니기 시작한 지금의 친구들을 사귀기 전에는 그에겐 가깝게 지내는 친구가 없었다. 친해지기 쉬워 보이는 인상과 달리 후타미 그 자신이 다른 사람들에게 쉽게 곁을 주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다니며 그는 많이 보아왔다. 함께 어울려 다니는 친구 사이면서도 누구 한 명이 자리에서 빠지면 자리에 없는 그에 대해 신이 나서 험담하는 사람들을.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배 안 쪽에서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 했다.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지금처럼 나를 욕할까?'라는 생각이 어떻게 해도 그의 머릿속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적당히 거리를 두며 사람들을 사귀어왔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마음을 터놓고 지내거나 여기저기를 놀러 다닐만한 친구는 없었다. 그렇게 지내던 것이 불과 2년도 안 된 일이건만 이제는 지금의 생활에 익숙해진 탓인지 혼자 있는 시간이 이루 말할 수 없이 지루하게 느껴졌다.
"하아~"
한숨을 내쉬며 발치에 걸리는 작은 돌멩이를 어딘가로 차버리는데 저 앞쪽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사람들이 몰려있는 것을 보아 어느 상점에서 이벤트라도 하는 것이리라. 마침 따분하던 참이라 후타미는 소란스러운 틈바구니로 발걸음을 옮겼다. 가까이 가니 멀찍이서 봤을 때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이럴 때는 큰 키가 도움이 된다며 후타미는 자기보다 키가 작은 여자아이들 무리의 머리 위로 빼꼼 고개를 내밀고 사람들의 이목이 향하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어?"
눈에 익은 모습이 보였다. 낯익지만 낯익지 않았다. 게슴츠레하게 뜨고 있던 눈을 크게 뜨고는 상대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후타미는 무의식적으로 상대를 향해 손을 붕붕 흔들었다. 얼마쯤 손을 흔들었는지 그의 팔이 저려올 즈음, 상대방과 눈이 부딪혔다. 상대는 놀란 듯 평소에도 작지 않은 눈을 크게 뜨고는 그를 향해 살짝 눈웃음을 지었다.
"후타미 군!"
소란이 잠잠해질 무렵 상점 뒤편의 주차장에 주차된 검은색 밴 앞에서 아사히나 유즈키가 손을 흔들었다. 그녀 쪽으로 다가서며 후타미는 그녀를 따라 미소 지었다.
"깜짝 놀랐어! 후타미 군이 여긴 어쩐 일이야?"
"아아, 오늘 잇세이랑 타카미치가 일이 있어서 혼자 시간 떄우러 나왔어~ 그보다 나도 깜짝 놀랐다고~"
"응?"
그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 것인지 파악을 못한 듯 그녀가 고개를 한쪽으로 살짝 기울이며 그를 바라보며 되물었다. 평소 보지 못한 옷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그 모습이 다른 때보다 더 귀엽게 보였다.
"에에, 윳쨩 오늘은 무대용 의상이잖아. 뭔가 신선한 걸~"
그의 답에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을 잠깐 내려다본 그녀는 다시금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보았다. '그렇네' 하고 그녀가 소리 내어 웃었다. 뭐가 즐거운지 혼자 쿡쿡 웃던 그녀는 별안간 몸을 돌려 자동차 뒷좌석에서 그녀의 것으로 보이는 가방을 꺼내 그 속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시간을 확인한 것인지 그녀는 금새 핸드폰을 닫았다.
"후타미 군은 이제 약속이나 그런 거 있는 거야?"
"으음 아니~ 할 일이 없어서 이대로 집에 가야 할까 하던 참."
"앗, 그래?"
기쁜 듯 눈을 반짝이며 그녀는 조수석의 창문 안으로 몸을 기울여 운전석에 있는 사람에게 말을 걸었다. '오늘은 친구랑 돌아갈게요 프로듀서!' 하는 말소리에 후타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친구인 그녀와 함께 이 지루한 시간을 때울 수 있다면 기쁜 일이긴 하지만.
"엣, 윳쨩 정말 괜찮아? 스케줄은~?"
"오늘은 이게 끝! 나 옷 갈아입고 올 테니까 잠시만 기다려줘!"
그녀는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당연한 듯 그의 품에 자신의 가방을 안겨주고는 그녀는 자신의 사복이 든 플라스틱 봉지를 들고 상점 안쪽으로 향했다. 멍하니 그녀가 사라진 방향을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자동차에 시동을 거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돌려 자동차 쪽을 바라보니 조금 전에 그녀가 '프로듀서'라고 불렀던 말끔하게 생긴 미남이 웃으며 말을 걸었다.
"그럼 오늘은 아사히나 양 잘 부탁할게요. 늦지 않게 바래다줘요."
네, 하는 별 것 없는 그의 대답을 들은 후에야 유즈키의 프로듀서가 운전하는 검정색 밴은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떠맡은 그녀의 가방을 품에 안은 채 멍하니 서있다 보니 상점의 뒷문을 열고 그녀가 나왔다. 조금 전까지 그녀의 외모를 더 빛나게 했던 옅은 노란색의 원피스는 간데 없고 목 주변만 바다색으로 되어있는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의 그녀가 있었다.
"에에~"
"뭐야, 그 반응은? 엄청 아쉬워하는 표정이네."
저도 모르게 내뱉어진 후타미의 안타까운 탄식에 그녀는 짓궂게 미소 지으며 그의 품에서 자신의 가방을 가져갔다. 그리고는 당연한 것처럼 번화가 쪽으로 향했다.
"어라, 윳쨩 어딜 가는 거야?"
"이대로 바로 집에 가기는 아쉽지 않아? 조금 돌아서 가자. 나 저 아래 카페의 소프트 콘 정말 먹고 싶었거든."
다시 원래의 그가 알던 그녀로 돌아가 있었다. 그것이 후타미는 평소와는 다른 그 모습을 조금 더 보고 싶어 아쉽기도, 원래 알고 있는 아사히나 유즈키라는 친구를 되찾은 것 같아 안심이 되기도 했다. 후타미는 성큼성큼 걸어가 그녀를 따라잡고는 그녀가 들고 있는 두 개의 짐 중 원피스 와 구두, 그리고 아까까지 그녀가 하고 있던 장신구들이 들어가 있는 플라스틱 봉지를 뺏어 들었다.
"이건 내가~"
"고마워, 후타미 군."
혼자 있을 때는 좀처럼 가지 않던 시간 금새 지나가버렸다. 한 것이라고는 아까 그가 들렀던 서점에 다시 들러 신간 책들을 보고 그녀가 사고 싶어 점 찍어 두었다던 책들을 사는 것, 전부터 가고 싶었다던 카페에 가서 소프트 콘을 각자 들고 나와서 거리를 걸으며 먹은 것 정도. 그녀가 결석했던 오늘 타카미치가 어떤 세상물정 모르는 도련님스러운 발언을 했고 그것 때문에 잇세이와 자신이 어떻게 놀렸는지 등의 시시껄렁한 학교에서의 이야기를 하는 사이에 그녀의 집 앞에 도착했다. 혼자 사는지 원룸 오피스텔 건물이었다. 처음 알게 된 사실에 건물을 스윽 훑어 올려다보는데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그녀가 작게 웃으며 말했다.
"아마 말 안 했지? 부모님은 지방에 계시거든. 뭐라도 대접하고 싶지만 아무 것도 없으니까 다음에 잇세이 군이랑 타카미치 군이랑 해서 정식으로 초대할게!"
왜인지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당연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느새 저녁 노을이 하늘을 붉게 물든 시간이니 친구라곤 하지만 동갑내기의 이성을 방에 들여 단 둘이 있는 것은 친구로서 잔소리 해주고 싶은 일이었다. 비록 상대가 그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오늘 고마웠어, 후타미 군. 조심해서 들어.... 아..."
그녀가 그에게 팔을 양쪽으로 흔들며 인사를 할 때였다. 톡톡, 작은 빗방울이 두 사람의 머리며 어깨에 떨어지기 시작했다. 갑작스럽게 떨어지는 빗방울에 하늘을 멍하니 올려다보며 후타미는 '오늘 비가 온다고 했던가?' 같은 생각을 했다.
"후타미 군!"
그가 다시 정신을 차린 것은 그의 이름을 힘차게 부르는 그녀 때문이었다. 얼굴에 비가 떨어지는 것도 개의치 않고 하늘로 향했던 시선을 거둬 그녀를 바라보자 그녀는 언제 어디서 꺼냈는지 옅은 연두색의 3단 우산을 그에게 건네고 있었다.
"괜찮다면 이거 쓰고 가."
홀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후타미는 지루하지 않았다. 사실 그녀의 집은 저 자신의 집과 정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제법 되는 거리를 돌아가야 했지만 오늘 소프트 콘을 그것을 맛있게 먹던 그녀의 모습, 좋아한다는 소설 시리즈를 신이 나서 떠들어대던 그녀의 모습 등 그의 머릿속을 즐거운 것들이 가득 채우고 있어 따분하지 않았다.
"아아 맛있었지, 그 소프트 콘~ 다음에 윳쨩이랑 또 먹을 수 있으면 좋겠네~"
기지개를 펴듯 두 손을 쭈욱 피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문득 겉면보다 조금 더 탁한 색의 연두빛 방수 천에 검정색으로 무언가가 적혀 있는 것이 보였다. 후타미는 뻗었던 팔을 다시 끌어와 검정 글씨를 자세히 살폈다.
「朝比奈 柚希」
정갈한 글씨로 우산 주인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한 쪽 귀를 접고 있는 모양의 귀여운 토끼가 그려져 있었다.
"귀여워."
검정색의 유성펜으로 그것을 그리고 있었을 그녀를 생각하며 그는 작게 소리내어 웃었다.
그 날, 우산 아래에서 간질간질한 무언가가 싹텄다는 걸 후타미가 깨달은 것은 그녀가 사라지고 나서였다.
환한 조명이 켜진 세트장과 그 안에서 29명이라는 대규모의 숫자로 함께 춤을 추는 아이츄들의 모습을 좌에서 우로 크게 둘러본 유즈키는 감격스러운 듯 눈물을 글썽였다.
"컷! 일단 쉬었다 하죠!"
감독의 컷 사인에 무대 위에서 내려오는 아이츄들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가까워 오자 그녀는 서둘러 검정 자켓 아래의 하얀 셔츠 소매로 눈가를 훔쳤다.
"프로듀서!"
잔뜩 상기된 얼굴로 달려와 점프하는 아이도우 세이야의 포옹을 능숙하게 피한 유즈키는 스탭들에게 받았던 큐시트를 가슴에 끌어안고 자신 쪽으로 다가오는 이들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프로듀서! 어땠어, 우리들? 나 지금 기분 최고야!"
"역시 우리 트윙클 벨이 가장 멋지지? 니시시!"
"잘 하고 있어, 다들!"
하얀색과 푸른색을 기본색으로 한 새로 맞춘 단체복을 입고 있는 아이츄들의 모습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빛이 났다. 오늘은 곧 있을 3기생 입소 및 아이츄 데뷔 1주년을 기념하여 팬들에게 선물로 공개하기 위한 사무소 에르돌의 단체 PV 촬영일이었다. 오늘의 촬영을 위해 유즈키는 몇 달 전부터 동분서주 해왔다. 신곡을 소속 그룹인 I♥B의 류카에게 맡기는 것에 대한 얘기도 내부 회의에서 나왔으나 한 그룹의 색에 편중되지 않은 곡을 만들기 위해서 결국 외부의 작곡가에게 곡을 맡기게 됐었다. 그리고 의상 역시 29명이라는 많은 수의 것을 만들어야 했기에 몇 달 전부터 유즈키는 디자이너와 수 차례의 미팅을 갖는 등 정신 없는 시간을 보냈다. 대인원이 참여하고 있기에 꽤나 장시간 이어지고 있는 촬영이었지만 다들 지친 기색도 없이 오히려 촬영 시작 초반보다 더욱 두 눈을 빛내고 있었다.
주로 3기생으로 이뤄진 어리광쟁이들이 유즈키의 가까이 다가와 붙어 자기가 어땠는지, 어떻게 하는 게 좋을지를 연신 물어댔다. 포위라도 당하듯 아이츄들에 둘러 쌓인 그녀는 그들의 물음 하나하나에 프로듀서로서의 감상과 조언을 해주었다. 정신 없이 답변을 해주다가 유즈키는 문득 아이츄의 일부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어라? 란슬롯과 미츠루기 군은 어디갔지?"
보통은 언제나 같은 그룹의 세이야와 카나타의 주변에 보호자 마냥 서있는 아키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어리광쟁이 그룹들이 그녀에게 치댈 때면 근처에서 그걸 흥미롭게 지켜보는 란슬롯의 세 명도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 주위를 살펴보자 그 넷 뿐 아니라 여러 명이 보이지 않았다. 천상천하의 린도우 츠바키와 호노오키 토오야, ArS의 아마베 시키와 와카오우지 라쿠도 보이지 않았다.
"언제 다시 촬영이 시작될지 모르는데 다들 어디 갔지? 아아, 나 애들을 좀 찾아보고 올게."
언제 감독이 다시 와 촬영을 재개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유즈키는 손목의 시계를 한 번 쳐다본 후 자리를 벗어난 아이츄들을 찾아 나서려 했다.
"에엣, 프로듀서~ 코코로 아까 촬영했던 솔로 파트가 마음에 들지 않아서 프로듀서의 조언, 듣고 싶은 걸! 그런 녀석들은 내버려두고 코코로랑 얘기하자!"
웬만한 여자 아이돌보다 귀여운 얼굴을 한 하나부사 코코로가 유즈키의 팔에 엉겨붙어왔다. 귀엽지만 제멋대로인 면이 있는 그였기에 유즈키는 결국 모습을 감춘 아이츄 일행들을 찾아나서는 걸 포기하고 그의 촬영에 대해 조언을 하기 시작했다.
"프로듀서! 큰일이야! 린도우 씨랑 토도로키 씨가!!"
어느 틈에 자리를 벗어났던 것인지 오이카와 모모스케가 뛰어들어오며 소리쳤다. 뛰어온 탓인지 상체를 숙인 채 숨을 몰아 쉬는 그의 눈높이에 맞춰 몸을 숙이며 유즈키는 무슨 일인지 물었다.
"그러니까 말이지... 대기실에서 린도우 씨랑 토도로키 씨가 싸움이 붙었어...! 다른 사람들이 말리고 있지만.... 역시 프로듀서가 가봐야 할 것 같아!"
울먹이며 상황을 전하는 모모의 말에 유즈키는 얼굴을 구겼다. 원래부터 사이가 그다지 좋지 못한 둘이었다. 2기생인 토도로키 잇세이는 1기생인 천상천하에 강한 경쟁의식을 갖고 있었던 데다 다른 사람을 깔보는 듯한 린도우 츠바키의 태도를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같이 중요한 날에 둘 사이에 시비가 붙다니.
"지금 당장 안내해주겠어? 다른 사람들은 여기서 얌전히 대기하도록 해. 알겠지?"
모모의 뒤를 쫓아 달리는 유즈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촬영하는 PV는 사실 3기생들의 1주년 이외에도 다른 의미가 있었다. 사무소 에르돌은 전세계인들이 애용하는 동영상 사이트인 유튜브에 공식 채널을 만들 예정인데 그곳에 가장 처음으로 올라가게 될 영상이 바로 오늘 촬영하는 PV였다. 그리고 이것을 시작으로 2기생들은 해외로 활동 영역을 넓힐 예정이다. 해외의 첫 무대는 앞서 해외에서 활동 중인 천상천하의 단독 콘서트의 오프닝 무대로 이미 얘기가 되어있다. 그런 상황에서 두 그룹 리더 간의 싸움을 전혀 좋지 못했다. 모모가 멈춘 대기실의 앞에 서서 잠시간 숨을 고른 유즈키는 일부러 조금 큰 목소리로 싸움의 주역인 두 사람의 이름을 부르며 문을 벌컥 열었다.
'펑!'
문이 열림과 동시에 들려온 큰 폭죽 소리에 유즈키는 놀라 뒤로 넘어질 뻔했다. 다행히도 뒤에 서있던 모모가 그녀가 넘어지지 않도록 등을 받쳐줬다. 약간 멍멍해진 귀를 문지르며 유즈키는 대기실 안을 둘러보았다. 시비가 붙었다는 두 사람뿐만 아니라 촬영 세트장에서 모습이 보이지 않던 아이츄들이 전부 모여있었다.
"프로듀서."
전해들었던 상황과는 달리 두 사람이 험악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은 것을 확인한 유즈키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봤다. 그러자 잇세이의 옆에 서있던 아카바네 후타미가 다가와 그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프로듀서, 어서 어서~"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은 유즈키가 당황하며 대기실 안의 사람들을 번갈아 쳐다보자 츠바키가 한쪽 입꼬리를 올려 씨익 웃으며 화장대 테이블 아래 쪽에서 상자 하나를 꺼내어 건넸다. 후타미에 이끌려 화장대 한 곳의 의자에 앉은 그녀는 그것을 받아 들고는 츠바키를 올려다봤다. 그룹의 컨셉으로 인해 일할 때면 화풍의 의상을 주로 입는 그가 새로운 의상을 입고 있는 것은 제법 신선했다. 당황해 있는 상황에서도 유즈키는 그의 의상이 그에게 꼭 맞게 잘 뽑혔다며 속으로 감탄했다.
"으음.... 이게 뭐야?"
"직접 보라고."
옆의 화장대 테이블에 걸터앉은 츠바키는 짓궂게 웃으며 말했다. 언제나처럼 그 옆에 서있는 토오야는 재밌다는 듯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둘의 그런 반응에 얼떨떨해 하며 유즈키는 반대편 쪽을 바라보았다. 츠바키와 마찬가지로 오른쪽 화장대 테이블에 걸터앉은 잇세이는 그녀를 가만히 응시하고 있었다.
"프로듀서. 어서 열어 봐라."
그녀의 뒤에 팔짱을 낀 채 서있던 산젠인 타카미치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가 말을 끝내자 그의 어깨에 팔을 걸친 채 서있던 후타미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아직 해야 할 게 많으니까~"
유즈키는 받아든 상자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아무래도 아이츄들이 준비한 선물인 것 같은데 어째서 갑자기 선물을 주는지 알 수 없었다. 상자를 무릎 위에 올려두고서 양 손으로 양쪽을 잡아 상자의 뚜껑을 들어올렸다.
"어때?"
상자 속의 선물을 확인한 유즈키를 말을 잃었다. 옆에서 잇세이가 그녀의 감상을 물어왔지만 그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놀라움과 기쁨, 그리고 알 수 없는 벅찬 감정으로 미세하게 떨리는 손으로 그녀는 상자 속의 선물을 조심히 들어올렸다. 사라락, 예쁘게 개어있던 하얗고 푸른 의상이 부드럽게 모습을 드러냈다.
"...이건....."
의상을 이루고 있는 기본 색상과 달려있는 장신구들로 봐선 오늘 촬영을 위해 만들었던 아이츄들의 의상과 하나임이 분명했으나, 새로운 의상들의 디자인의 컨펌을 담당했던 유즈키는 이런 디자인의 의상을 보았던 기억이 없었다.
"헤헤, 예쁘지, 프로듀서~?"
가시지 않은 놀라움에 여전히 눈을 크게 뜨고 있던 유즈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의상을 들어올려 쳐다보았다. 의상에 달린 망토와 하얀 깃털, 금속 장식 등이 29명의 아이츄들이 입고 있는 옷과 꼭 가족 같아 보였다.
"우리가 프로듀서 몰래 이거 준비한다고 얼마나 고생했는지 모르지?"
"다들 프로듀서의 의상을 자기 그룹과 같은 디자인으로 만들려고 해서 지금의 디자인이 나오기까지 꽤나 고생했지 뭔가."
"후후, 그러니까요. 특히 쌍둥이들과 코코로 씨가 어찌나 욕심을 부리던지.... 자, 이제 다들 그만 엿듣고 들어오지 않겠어요?"
작게 소리내 웃으며 토오야가 닫혀있던 문을 열자 와르르 세트장에 있어야 할 아이츄들이 밀려 들어왔다.
"흥, 그야 프로듀서는 귀여운 여자아이니까 우리 POP'N STAR와 같은 의상이어야 하는 게 당연하잖아?"
"아니지, 아니지! 프로듀서는 우리를 이끌어주는 사람이니까 우리 그룹 의상에 있는 왕관 장식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렇게 따지자면 프로듀서와 가장 연이 깊은 우리 란슬롯에 맞춰 공주님 같은 복장이어야지."
가만히 다른 아이츄들이 주고 받는 대화를 듣고 있던 타카미치가 나서서 한 마디 했다. 그러자 비슷한 자세로 화장대 테이블에 기대어 있던 츠바키와 잇세이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며 잇세이가 말했다.
"다 끝난 얘기, 다시 꺼내봐야 소용 없잖아?"
그 말에 동의한다는 듯 츠바키가 팔짱을 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몸을 일으키고서 의상의 옷매무새를 고치고는 뒤돌아 다른 아이츄들이 모여있는 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방을 나갈 것 같던 그는 몸을 반쯤 돌려 여전히 멍하게 의자에 앉아있는 유즈키를 향해 말했다.
"자, 어서 갈아입으라고, 프로듀서. 아니, ........아사히나 선배. 당신이 없으면 다시 촬영을 시작할 수 없다고. 우리의 시작이잖아, 네가."
오늘 안으로 처리해야 할 일들의 우선 순위를 머릿속으로 매기면서 유즈키가 교무실로 향하는 발걸음을 서두를 때였다. 뒤에서 귀에 익은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자 그녀는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았다. 물론 그녀는 잊지 않고 몸을 돌리며 고개를 살짝 옆으로 했다. 그러자 그녀의 예상대로 검지 손가락 하나가 공중에서 멈칫했다.
"쳇. 이번에도 실패~ 프로듀서는 어째서 맨날 내 장난을 간파해버리는 거야?!"
이제는 익숙하기까지 한 볼멘소리를 들으며 유즈키는 빙그레 웃었다. 매번 장난을 피하거나 장난에 가만히 당해주지 않고 되돌려주는데도 그녀와 마주 서있는 소년, 사츠키는 질리지도 않고 그녀에게 계속해서 장난을 시도했다.
"아직 10년은 이르다니까, 사츠키 군."
과장스럽게 어깨를 떨어트리며 사츠키는 쳇 하고 소리를 뱉어냈다. 그 모습을 보며 유즈키는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려다가 그가 그런 '어린아이 취급'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떠올리곤 손을 멈췄다. 그리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머리를 귀 뒤로 넘기며 그에게 물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야 사츠키 군?"
"프로듀서. 바빠? 아니다, 바빠도 이거 봐줘. 나 마술 연습했다고~"
"마술?"
뜬금없이 자신이 연습해온 마술을 봐달라는 말에 유즈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최근에 그에게 들어온 일들 중엔 마술을 선보여야 하는 일이 없음은 그의 프로듀서인 그녀가 가장 잘 아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로서는 의아할 수 밖에 없었다.
"일단 그냥 봐줘~ 프~로~듀~서~"
보채듯 말하는 그의 말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들고 있던 서류들을 겨드랑이에 사이에 낀 채로 팔짱을 끼고 그를 바라봤다. 사츠키는 눈을 반짝이며 양손을 쫘악 펴 그녀에게 보였다.
"아무것도 없지?"
그는 여전히 눈을 빛내며 자신을 뚫어지도록 바라보는 그녀의 귀 뒤쪽으로 손을 뻗었다. 뻗어오는 가는 손목을 따라 유즈키의 눈이 이동했다.
"프로듀서의 귀걸이 좀 빌릴게."
"읏, 무슨 소리야 사츠키 군!"
그러나 그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이미 그의 손은 그녀의 귓불에 걸려있는 귀걸이를 빼냈다. 귀걸이를 손바닥에 쥔 그는 자신 쪽으로 손을 다시 접었다. 일부러 애를 태우듯 천천히 멀어지는 손길을 그녀가 눈으로 쫓자 그는 이번에는 자신의 양손을 동그랗게 모아 쥐고 손을 위아래로 흔들었다. 귀걸이 한 쪽을 가지고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궁금해진 유즈키는 그의 모아진 양손을 말없이 응시했다.
"짠!!"
꽤나 귀가 따가운 소리를 내며 사츠키가 모아 쥐었던 양손을 쫙 폈다. 원래대로라면 자신의 귀걸이가 있어야겠지만 그래서는 마술이 되질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나타날까 하고 생각했지만 웬걸, 그의 손바닥은 아무것도 없이 깨끗했다. 아주 잠깐 당황했던 유즈키는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없다...."
마술이라고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사츠키의 프로듀서 골리기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한 유즈키는 재킷 주머니를 검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는 건 여기 있는 거지, 내 귀걸이?"
사츠키에게 단정 지어 물은 후 유즈키는 주머니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그것을 본 사츠키가 서둘어 몸을 뒤로 빼며 양손으로 주머니를 막았다.
"으아아앗 스톱~! 스톱, 프로듀서! 주, 줄게, 준다니까!"
당황하여 말을 버벅이는 그를 보며 사츠키는 풋 하고 소리내어 웃었다. 얼굴까지 발그레해진 것을 보아 그녀의 추측대로 귀걸이는 그의 주머니에 있는 것 같았다. 그녀는 다시 팔짱을 끼고 그가 주머니에서 귀걸이를 꺼내 돌려주길 기다렸다. 그녀가 자신을 빤히 쳐다보자 그는 분한 듯 쳇 거리며 주머니에 조심스럽게 손을 집어넣었다 뺐다.
"눈 감아 봐, 프로듀서."
"귀걸이라면 직접 낄테니..."
유즈키는 귀걸이를 돌려달라며 손바닥을 그의 앞에 뻗었다. 다시 한 번 눈을 감으라고 재촉했지만 그녀가 그것을 따르지 않자 사츠키는 오버스럽게 한숨을 쉬면 한 손으로 그녀의 손목 부근을 잡았다. 그의 행동에 유즈키는 저도 모르게 '응?'하고 소리내며 그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손가락에 느껴지는 이상한 감촉에 다시 자신의 손을 보았다.
"엣?"
그녀의 손가락에는 무언가가 껴있었다. 유즈키는 손등이 위로 가도록 손바닥을 뒤집어보았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는 크지 않은 노란 꽃과 그 줄기로 만들어진 꽃반지가 껴있었다.
"늘 내 장난은 눈치채는 주제에 이런 부분에선 눈치가 없다니까~ 프로듀서 바보!"
넋을 놓은 채 꽃반지를 바라보던 유즈키는 그것을 만들고 있었을 사츠키를 생각하자 웃음이 났다. 아하하 하고 소리를 내며 그녀는 손가락을 쫙 펴 그에게 잘 보이도록 그의 얼굴 높이까지 손을 들어 보여줬다.
"아하하, 딱 맞네. 선물인 거야?"
상대까지 덩달아 기분 좋아지게 하는 그녀의 미소에 사츠키는 입술을 앙 다물어 씰룩 거리는 입술 끝이 멋대로 올라가지 않도록 참았다.
"그... 나, 나중엔 진짜를 줄 테니까! 그때까진 그...그 꽃반지 외에 다른 건 끼면 아..안돼! 절대로 안돼!"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말을 쏟아낸 사츠키는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건물 밖으로 통하는 문이 있는 방향으로 전력 질주해 사라졌다. 주변의 작은 먼지들을 일으키며 떠난 제자가 사라진 방향을 보며, 그녀는 석양 때문인지 발갛게 물들어 있던 그의 얼굴을 떠올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손등이 보이도록 손을 펴고 반지를 쳐다보던 그녀는 불현듯 소리쳤다.
"내 귀걸이!"
이때 그녀는 전혀 몰랐다. 몇 년 후, 이십대의 청년이 된 그가 그녀에게 실제로 반지를 내밀 줄은.
십 여분 간 노트북의 화면을 노려보고 있던 잇세이는 결심을 굳히고 화면에 띄워져 있는 검색창에 지금껏 몇 번이고 썼다 지웠던 이름을 적어 넣었다. 「朝比奈 柚希」. 익숙한 이름, 그리고 지난 몇 년간 핸드폰 액정에 뜨길 기다렸던 이름이었다. 자연스럽게 다시 또 백스페이스로 향하는 손가락의 방향을 돌려 엔터키를 눌렀다. 그저 노트북의 자판을 누를 뿐인 이 일을 잇세이는 몇 번이고 반복했었다. 하지만 늘 엔터키를 누르기 전에 백스페이스를 누르거나 창을 끄곤 했다. 주르륵, 검색창에 적어넣은 '아사히나 유즈키'라는 이름과 관련된 페이지나 글의 목록이 가득 떴다. 그 중 대부분이 몇 년 전의 글들이라는 점이 잇세이의 입안을 쓰게 했다. 사진 카테고리를 눌러 화면에 뜬 사진들을 위에서부터 눈으로 훑었다. 사진 속의 그녀는 그가 기억하는 모습에 비해 다소 과하게 귀여운 의상들을 입고 활짝 웃고 있거나 마이크를 들고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낯설었다. 그의 기억 속 그녀는 화려한 것 보단 수수한 옷을 선호했고 또래의 다른 여자 동급생들에 비해서 화장도 거의 하지 않는 편이었다. 그래서인지, 분명 이 사진들 속의 그녀는 그와 알고 지내던 시절의 그녀일 텐데도 그가 기억하는 평소와는 달리 화장품으로 볼을 발그랗게 물들이고 웃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사진들을 한참을 본 후에야 잇세이는 다시 통합검색 카테고리로 이동했다. 페이지에 뜬 글들을 읽으며 내리다 보니 그녀가 속했던 소속사의 이름이 적혀있었다. 「사무소 에르돌」. 잇세이는 아까 전에 자신이 적었던 이름을 지워내고는 대신에 그곳에 '사무소 에르돌'이라고 적었다. 그가 찾고 있는 것이었다. 파란 글씨로 뜬 홈페이지 주소를 누르자 에르돌 사무소의 내부로 추정되는 공간의 모습이 홈페이지의 배경으로 떴다. 잇세이는 사무소를 소개하는 페이지로 넘어가 그곳에 적힌 설명들을 천천히 읽었다. 사무소의 소속 아이돌 페이지를 누르자 남자 네 명이 화식 복장을 입고 잔뜩 거만한 포즈를 취하고 있는 그룹만이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그녀의 이름은 없었다.
"왜 녀석은 없지?"
분명 화면 한 켠을 차지하고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이의 사진이 없자 잇세이는 그 페이지에 더 이상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스크롤바를 올렸다 내리기를 반복했다. 은퇴한 사람은 더 이상 사무소에 이름이 적히지 않는 건지 의문을 느끼며 잇세이는 사무소로 찾아오는 방법을 안내하는 페이지로 화면을 이동시켰다.
다음 날 점심 시간이 지났을 무렵, 잇세이는 한 낯선 사무실의 소파에 앉아 그 방의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런 약속도 없이 무작정 사무소를 찾아온 것이었지만 약속을 하지 않았단 말에 처음엔 사장님은 외출 중이라고만 전했던 사장의 비서는 잇세이의 사나운 눈매에 혼자 겁을 잔뜩 집어먹고는 그를 사장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덕분에 에어컨이 나오는 시원한 방에서 편히 기다렸으니 이번만큼은 자신의 눈매에 고마워 해야겠다고 그는 속으로 생각했다. 혼자만 남겨진 채로 방을 눈으로 찬찬히 살피고서도 한참의 시간이 지났다. 슬슬 가만히 앉아있는 것에 몸이 근질근질해지던 차에 달칵, 하고 문이 열렸다. 마침내 사장이 온 것인가 하고 문을 향해 몸을 돌린 잇세이의 눈에 들어온 것은...
".............곰탈?"
"에에, 너무해요! 곰탈이라니!"
"......? 그보다 사장은 언제 오는 거지."
사무소 홍보용인지, 곰탈을 쓴 사람의 등장에 일순 깜짝 놀랐던 잇세이는 혼잣말을 내뱉으며 다시 몸을 돌렸다. 그러자 곰탈을 쓴 사람이 잇세이의 앞쪽으로 다가와 반대편 소파에 앉았다. 이 사무소의 사장에게 용무가 있는 또 다른 손님인가 하고 생각하며 잇세이가 손목의 시계를 들여다보려는데, 곰탈이 다시 말을 걸어왔다.
"내가 바로 에르돌의 사장이에요~ 그리고 아이돌 양성학교인 에트월 뷔오스쿨의 교장이기도 하죠~"
잇세이는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눈매만큼이나 묘하게 위압감을 주는 눈썹을 찡그리며 자신이 들은 말에 대한 반응을 가감 없이 토해냈다.
"하?"
"히익~!"
그저 잘못 들은 것 같아 그저 되물었을 뿐인데 곰탈이 오바스럽게 자신이 겁 먹었음을 표현했다. 미친 사람은 아닌가 싶어 곰탈을 뚫어지게 보는데 방금 전의 반응이 연기인가 싶을 정도로 그가 태연하게 무슨 일로 자기를 만나러 온 거냐고 물어왔다.
"아아. 아사히나 유즈키. 지금 어디 있지?"
"호오... 그녀를 찾는 사람은 오랜만이네요. 그런데 아사히나 양을 찾는 이유가?"
조금 장난스럽던 높은 목소리가 한 순간에 낮게 깔리며 잇세이에게 답을 요구했다. 잇세이는 순간 자신이 꺼내선 안 될 말을 꺼낸 것인지 고민했다. 하지만 그는 그저 이곳에 소속됐었던 아이돌의 행방을 물었을 뿐이다. 그것도 몇 년이나 참다가 이제야.
"그 녀석의 동창, 토도로키 잇세이다. 그 녀석 어느 날 갑자기 자취를 감췄는데. 그 녀석이 있었던 사무소라면 알까 싶어서."
"....글쎄요."
"무슨 대답이 그렇지?"
잇세이는 상대의 시원치 않은 대답에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사히나의 행방을 알면 안다, 모르면 모른다고 하면 될 일이다. 곰 사장의 이도 저도 아닌 대답이 잇세이의 신경을 건드렸다.
"하지만~ 지금은 모르지만, 알아볼 방법은 있어요."
"하? 그럼 그렇다고 먼저 말하라고. 그리고 빨리 알아봐 줘. 죽었는지 살았는지 몇 년 간 연락조차 되지 않는 녀석이니."
팔짱을 낀 채로 사장에게 아사히나 유즈키의 행방을 서둘러 알아봐달라고 얘기하며 잇세이는 사장의 얼굴... 위의 곰 탈의 얼굴을 바라봤다. 그때, 잇세이는 곰탈에 가려져 볼 수 없는 사장이 '웃고 있다',고 느꼈다. 보이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렇게 느껴졌다. 묘하게 드는 이상한 예감에 몸을 뒤로 주춤하자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곰 사장이 잇세이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눈 쪽을 마주 바라봤다간 이상한 일에 휘말려들 것만 같은 찝찝함에 잇세이는 앞으로 몸을 기울인 탓으로 배 부근이 접혀진 곰탈이 배 부근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치 뱃살 같다,는 쓸데없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이돌을 해보지 않겠어요?"
다시 한 번 자연스럽게 잇세이의 입에서 '하?' 하는 소리가 튀어나왔다. 찝찝한 예감대로 곰탈을 쓴 괴상한 사장은 그 자신의 모습처럼 이상한 소리를 꺼내었다. '아이돌? 내가?' 하고 잇세이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무슨 헛소리지?"
"당신이 찾는 아사히나 양은 우리 에르돌의 첫 아이츄였죠. 정확히는 시범작 같은 거지만요~ 어쨌든 그녀로부터 시작된 우리 사무소의 아이츄가 되어 보지 않겠어요?"
솔직히 말해서 잇세이는 곰 사장이 정말로 미쳤다고 생각했다. 토도로키 잇세이, 그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의 매서운 눈매였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저 쳐다봤을 뿐인데 자기를 노려봤다며 겁을 먹는 동급생들, 시비 거냐며 욕을 하던 상급생들을 여럿 겪으며 잇세이는 한쪽 앞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기 시작했다. 두 눈 중 한쪽이라도 가리고 다니면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양쪽 눈을 다 가릴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렇게 하면 분명 여기저기에 부딪히며 다닐 게 뻔하므로. 하지만, 물론, 효과는 전혀 없었다. 한쪽 눈을 가리고 나서도 여전히 주변 사람들은 이유 없이 겁을 먹고 그를 피하거나 뒤에서 수군거렸다. 잇세이는 그런 시선도, 수군거림도 전부 걸리적 거리고 귀찮았다. 그래서 그때부터 잇세이는 모든 사람들에게 거리를 더 뒀다. 접촉을 최소한으로 하면 상대방의 불쾌감도, 그 자신이 느낄 불쾌감도 줄어들 테니 그것이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외롭다는 것조차 느끼지 못할 만큼 그런 생활에 익숙해졌을 때였다, 찾고 있는 그녀를 만난 것이.
"당신이 예전의 자기처럼 아이츄가 되었단 걸 알면 그녀도 기뻐할 거에요~"
"어딨는지도 모른다면서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분명 곰탈 때문에 그 속의 사람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그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찾아드리죠~ 당신이 우리의 아이츄가 되어준다면."
"......"
"아사히나 양은 연예계를 떠나기엔 너무나 많은 재능을 가지고 있죠. 그녀는 이 업계에 있어야 할 사람이죠~ 하지만 이제 그녀가 다시 아이츄로 활동하는 건 조금, 어려워요~ 그러니 그녀가 '다른 위치'로 나마 이곳에 돌아올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줄, 약간의 자극이 필요해요~"
"그 말인즉슨, 내가 그 자극이 되라는 거군."
"이해가 빨라서 다행이에요~"
잇세이는 여태껏 저 자신이 아이돌 같은 게 되는 걸 상상해본 적조차 없었다. 친하게 지내던 아사히나가 아이돌 활동을 하는 걸 옆에서 보면서도 한 번도 그렇게 되어보고 싶다거나 되면 어떨까 하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는 아이돌이라는 일에 얼마나 자신이 안 어울리는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돌 같은 건, 본인 같은 사람이 아니라 아사히나처럼 반짝이는 사람에게나 어울리는 일이 아닌가. 가만히 있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들을 겁에 질리게 하는 자신에게 사람들을 기쁘게 하는 아이돌이라는 직업만큼 안 어울리는 직업이 있을까?
"미안하지만 난 그런 과가 아니라서."
"아이돌의 가장 큰 무기가 뭐라고 생각하세요?"
"...글쎄. 반짝임?"
"틀렸지만 조금은 맞았네요~. 정답은 바로 매력이에요~. 하지만 모든 아이돌이 같은 매력을 갖고 있다면 그건 대중들에게 '매력'으로 다가오지 않겠죠. 연예계의 무서운 점은 조금만 오래 자리를 비우면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잊혀진다는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가지지 않은 독특한 매력은 아주 훌륭한 무기가 되죠! 그리고 당신은 충분히 그걸 가지고 있고요~ 어때요? 아이츄가 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요~?"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하지만 어쩌면 이것이 아사히나 유즈키를 찾을 유일한 방법일지도 모른다. 도둑이사를 가버려서 거주지도 모르고, 핸드폰 번호와 메일을 바꾼 것인지 연락해도 답장은 없다. 그래도 그녀 쪽에서 다시 먼저 연락해올 거란 생각으로 몇 년을 보냈다. 하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그녀에게선 연락이 없었고 이제 그는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 답은 아니란 것을 안다. 그리고 마침 알바도 며칠 전에 그만뒀다.
"아사히나는 약속대로 찾아내겠지?"
"물론이에요~!"
"좋아. 해보지. 단, 아사히나를 찾는 것 외에 나도 조건이 하나 있다."
"뭐죠?"
"같이 할 사람은 내가 직접 찾겠어. 낯선 녀석들과는 제대로 호흡 맞출 수 없으니까."
"좋아요, 잇세이군. 하지만 서둘러주세요~. 곧, 에트월 뷔오스쿨의 2기생을 모집할 거니까요."
곰 사장은 신이 나서는 에트월 뷔오스쿨이라는 본인들의 아이돌 양성학교에 대해 설명하며 책자를 건네줬다. 잇세이는 양성학교를 홍보하는 책자를 휘리릭 넘겨보며 사장의 말을 들었다. 사장에 따르면 잇세이가 그곳에 입소하고 나면 거기에서 춤과 노래, 그리고 연기 등을 배우며 아이돌이 되기 위해 아이츄로서의 활동하게 된단다. 학교와 아이츄로서의 활동에 대한 설명을 대충 흘려들은 후, 잇세이는 곰 사장에게 건네 받은 이력서에 자신의 신상정보를 간단하게 기입했다. 그렇게 당장 필요한 것은 끝난 것인지 곰 사장은 신이 난 채로 일어서 그를 배웅해줬다.
잇세이는 스스로도 터무니없는 짓을 저질러버렸다는 것을 잘 알았다. 거기다 일이 너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버렸다. 다른 방도가 없으니 어쩔 도리가 없다며 스스로 되뇌며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손에 들린 책자를 내려다보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하여간 손이 많이 가는 여자라니까."
그는 후드의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에서 한 이름을 찾아 전화버튼을 눌렀다. 짧은 연결음이 지나고 달칵, 상대가 전화를 받는 소리가 났다. 잇세이는 자신이 꺼낼 말에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상상해보았다. 분명 또 자길 놀리는 거냐며 화를 내겠지.
"어이, 타카미치. 나랑 같이 일이나 하자."
토도로키 잇세이는 강하게 내리쬐는 여름의 태양 아래에서 한 손의 주먹 쥐며, 마치 이미 아사히나 유즈키를 찾은 사람처럼 의기양양하게 씨익 웃었다. 셋이서 다시 그녀를 찾으면 된다, 고등학생 때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