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감정의 이름은 질투
W. 소담(@kimiga_iru)
"오늘 촬영 괜찮았던 것 같지 않아, 이즈미 쨩~?"
후후, 하고 웃으며 아라시가 이즈미 쪽을 쳐다보며 말했다. 일요일이었지만 그리비아 모델인 두 사람에겐 가을을 겨냥한 의류 촬영이 잡혀 있었다. 오전 아홉 시쯤 모여 메이크업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본 촬영에 들어가, 모든 촬영이 끝나고 나니 어느새 오후 5시가 넘어 있었다. 하루 종일 촬영을 하고서도 아직도 기운이 남은 건지 아라시 종알종알 옆에 있는 이즈미에게 말을 걸어왔다.
'아~아, 시끄러워...'
실내 촬영에 스튜디오에 에어컨이 틀어져 있긴 했지만 긴 소매의 가을 옷을 입어야 했던 이즈미에게는 충분치 않았다. 원래부터 더위에 엄청나게 약했기 때문에. 평소였다면 이미 짜증나니까 조용히 좀 하라는 말을 몇 번이고 날렸을 테지만 이즈미에겐 그럴 힘조차 남아있지 않았다.
"어머?"
반쯤 정신을 놓고 저 앞 쪽의 바닥을 바라보며 걷던 이즈미는 아라시의 무언가에 놀란 듯한 소리에 반사적으로 오른쪽에 있는 그를 돌아보았다. 아라시는 그가 자주 하고 있는 턱에 손을 가져다 댄 포즈를 하고는 그들이 방금 지나온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머, 혹시 안즈 쨩?"
안즈? 하고 익숙한 이름에 반응하여 이즈미가 왼쪽으로 몸을 돌리려는데 아라시가 바라보던 사람이 예상대로의 사람이었던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니! ...와 세나 선배!"
몸을 돌리자 익숙한 사람이 익숙하지 않은 모습으로 그들에게 사뿐사뿐 뛰어오는 게 보였다. 익숙한 교복이나 져지 차림이 아니었다. 허벅지 조금 아래까지 오는 연노랑 빛의 원피스에 그보다 길다란 하얀색의 시스루 가디건, 그리고 발목에 끈이 있고 굽이 3cm 정도 돼 보이는 하얀색 구두. 거기다 평소의 질끈 위로 묶은 머리나 그냥 풀어놓은 머리가 아니라 머리를 한 쪽으로 넘겨 예쁘게 땋아 작은 꽃 모양의 핀을 여러 개 꼽고 있는 그런 머리 스타일. 어라? 이 녀석 이렇게도 하고 다니는 녀석이었던가? 생각지도 못한 안즈의 차림새에 더위로 반쯤 고장난 이즈미의 뇌에 과부하가 오는 듯 했다.
"....안즈?"
"엣... 뭔가요, 그 표정?"
이즈미는 낯선 모습의 안즈가 평소에 종종 봤던 표정을 짓자 이즈미 본인도 설명하기 어려운,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가만히 안즈를 쳐다보고 있는데 역시나 그녀를 쳐다보고 있던 아라시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어머 어머... 안즈 쨩 혹시 데이트?"
데이트, 라는 단어에 반응해서 이즈미는 안즈가 달려왔던 방향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곳에는 똑같이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제법 큰 키의 한 남자가 서 있었다.
'이 녀석... 안즈, 남자친구가 있었어?'
이즈미는 여태껏 단 한 번도 그녀에게 남자친구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못생겼다거나 매력이 없어서 그런 것은 아니다. 매일 구박하고 있긴 하지만 사실 이즈미는 그녀가 귀엽게 생겼다고 생각해왔고 실제로도 그랬다. 단지 꾸미는 것에 흥미가 없는 것인지 그녀는 학교가 아닌 외부에서 열리는 행사에서도 언제나 져지 차림이었고 머리도 평범하게 질끈 올려 묶은 머리였을 뿐, 얼굴의 본바탕은 특별히 화장을 하지 않는데도 귀여운 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남자친구가 있다고 생각하기에 그녀는 너무 바빴다. 뭐든 혼자 떠안으려고 하는데다 언젠가부터는 주변 사람들이 걱정할 만큼 워커홀릭 기질을 드러내기 시작했었다. 근데 그런 안즈에게 남자친구? 있을 리 없잖아!
"후후, 데이트라면 데이트려나?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은 오늘 가을 의상 촬영이었죠? 촬영 고생 많으셨어요!"
재밌다는 듯 웃으며 모호하게 대답한 그녀는 일부러인지 알 순 없지만 화제를 돌렸다. 그러자 옆에서 아라시가 안즈에게 자연스럽게 바뀌어버린 화제에 대해 열을 올리며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아라시의 말을 흘려 들으며 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여 가며 얘기를 듣고 있는 안즈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두 뺨이 평소보다 발그레 했다. 볼터치라도 한 것일까? 그러고 보니 입술도 원래의 입술 색과는 다른 색으로 물들어 있다.
"안즈 화자...."
"대화 중에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안즈. 미안한데 서둘러야 할 것 같아. 영화 시간에 늦을지도 몰라."
분명 저 만치에 있었는데 어느새 안즈의 바로 옆까지 다가온 그 정체불명의 남자가 이즈미와 아라시를 향해 꾸벅 인사를 하고는 안즈에게 말을 걸었다. 안즈, 라고 친근하게 부르며. 흐응, 이 둘은 영화를 보러 가는 길인 건가?, 하고 이즈미는 생각했다. 그리고는 안즈를 내려다보고 있는 상대의 얼굴을 가만히 응시했다. 분명 초면일 텐데도 이상하리만치 익숙한 느낌이 드는 얼굴이었다. 설마 어디서 본 적이 있는 사람일까? 신인 모델 중 하나던가? 이즈미가 이 묘한 느낌의 답을 떠올리려 애쓰는 사이 정체불명의 남자를 향해 돌아보고 있던 안즈가 아라시와 이즈미의 방향으로 다시 돌아섰다.
"전 이만 가봐야 할 것 같아요. 두 사람 집까지 조심히 들어가세요."
가볍게 목례를 한 후 안즈는 그 남자에게 작게 '가자' 라고 말하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그의 팔에 팔짱을 꼈다. 이즈미는 어쩐지 한 방 먹은 기분이었다.
"어머..... 뜨겁네, 두 사람."
옆에서 아라시의 쓸데없는 말이 들려왔다. 설명하기 어려운 떨떠름한 기분이 형태를 갖춰 가슴 한 가운데 뭉치기 시작한 것 같았다.
"완전... 짜증나. 더우니까 얼른 가자고, 나루 군."
이상하게 올라오는 불쾌감에 이즈미는 서둘러 그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는 둔감한 사람이 아니었기에 설명이 어려운 이 불쾌감이 무엇인지 얼추 설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만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저 두 사람, 어쩐지 닮지 않았어? 안즈의 남자친구 상당히 귀여운 얼굴이던 걸!"
아아, 그런 거였나? 이즈미는 아라시의 말에 아까 느꼈던 묘한 친숙함에 납득했다. 그는 안즈와 어딘가 닮았다. 얼굴의 분위기 같은 부분이. 아무래도 안즈는 자신과 닮은 생김새의 사람이 취향인 모양이었다. 이즈미는 흘끗, 이미 그 둘의 뒷모습 마저 보이지 않는 거리를 뒤돌아보고는 걸음을 옮겼다.
"안즈~ 남자친구가 있었다는 거 사실~?"
방과 후 나이츠의 전용 스튜디오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안즈가 받은 질문이었다. 그녀가 오기 전까지 스튜디오는 어제의 안즈 이야기로 분위기가 고조되어 있었다. 물론 이야기를 한 것은 아라시였다. 이즈미는 관심 없다는 듯 소파에 깊게 눌러 앉아 리츠의 질문을 쫓아가지 못해 당황하는 안즈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건 또 무슨 소리야, 리츠 군?"
"낫쨩이 어제 봤댔어. 잘~생긴 남자랑 데이트 하는 예쁘게 차려 입은 안즈."
"그렇습니다 누님! 나루카미 선배가 누님에게 남자친구가...남자친구가....... 대체 누굽니까?! 어디의 어떤 분이죠?! 누님께 match하는 분인지 이 스오우 츠카사가 check 해야겠습니다!"
어제의 분위기로 봐선 사귀는 사이임이 분명했다. 아직 본인이 확인해주지 않은 사실을 속으로 단정하며 이즈미는 인상을 찌푸렸다. 남자친구를 사귈 여유는 있었나 보네? 하는 심술궂은 생각만 들었다.
"아하하하. 그 얘기였어?"
다음 순간 들려온 건 안즈가 즐겁게 웃는 소리.
"걔 남자친구 아니야! 어제 세나 선배랑 언니가 본 건 내 남동생인데! 왜 있잖아, 일반과에 있다고 했던..."
"...? 하지만 나루카미 선배에 따르면 누님께서 데이트라고 얘기하셨다고...."
"어라, 다들 종종 그렇게 표현하지 않나? 남매나 형제, 자매들끼리 함께 놀러 가거나 할 때 데이트한다고."
뭐야, 그런 거였어? 구겨졌던 이즈미의 미간이 스르르 다시 제자리를 찾아갔다. 별 거 아니었다. 역시 그녀에겐 남자친구 같은 건 없었다. 안즈의 말을 토대로 머리 속으로 어제 보았던 것들을 정리했다. 그런데 어제 봤던 상대가 안즈의 남자친구가 아니란 걸 확인하고서 곱씹어 생각할수록 이즈미는 짜증이 밀려 올라왔다.
"그런 거 외동인 내가 알 리가 없잖아! 진짜 완~전 짜증나!!! 그렇게 꾸미고 있으면 누구라도 남자친구라고 생각하게 되잖아?! 평소엔 이런 모습이면서 건방지게."
진짜로 하고 싶은 말은 평소엔 어째서 그렇게 예쁘게 꾸미지 않냐는 것이었지만 평소의 말 습관 때문인지 말이 곱게 나오지 않았다. 괜히 혼자 질투했다는 사실에 심통이 나서 애꿎은 그녀에게 심술을 부리는 거기도 했지만.
"하지만 그런 차림으론 일을 하기 불편하잖아요? 프로듀서니까 이것저것 해야 할 일이 많은데 역시 그런 차림은 움직이기도 불편하고. 그리고 제가 빛나게 해야 하는 건 제 자신이 아니잖아요?"
하나부터 열까지 다 옳은 소리다. 담당 아이돌의 무대에 사용하는 장치들 체크, 의상 체크, 아이돌들을 위한 간식과 물, 타올 준비 등등 공연 전과 중간에 그녀가 해야 할 일은 수도 없이 많아서 사실 그녀는 앉아서 편히 쉬는 것조차 어려웠다. 예쁜 원피스에 구두를 신고 소화하기엔 그녀 자신이 괴로울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즈미는 짜증났다. 어째서 그렇게 예쁘게 해서 사람을 오해하게 만들었을까? 안즈가 나쁜 거잖아! 제멋대로라는 건 알지만 이즈미는 그렇게 자신이 느꼈던 질투를 속으로 합리화했다.
"읏... 안즈 주제에 건방져."
이즈미는 혼자만 레슨복으로 갈아입지 않은 것을 눈치채고는 부랴부랴 탈의실로 향하며 다음에 안즈의 동생을 우연히라도 마주치게 되면 맛있는 것이라도 사줘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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