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흔하고 현실적인 연애
W. 소담(@kimiga_iru)
처음부터 이랬던 것은 아니었다. 분명 우리에게도 서로의 마음을 몰라 혼자 속을 태우던 때도, 어렵게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온 세상을 손에 넣은 듯 행복해 하던 때도, 있었다. 먼저 졸업한 그가 아직 학교를 다니는 나를 사회에 나가 기다려줬고, 내가 졸업하고 나서 몇 달 지나 우리는 동거를 시작했다.
그는 세상에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자유분방한 사람이었다. 학창시절엔 학교 내의 강호 유닛인 Knights의 리더로서 아이돌 활동도 했던 그지만, 졸업과 동시에 아이돌 활동은 중단하고 작곡 활동만 해오고 있다. 그의 '기사'였던 네 사람은, 먼저 졸업한 세나 선배가 모델 활동을 하며 리츠 군과 아라시 쨩의 졸업을 기다렸다가 셋이서 유닛을 결성해 함께 활동을 시작했었다. 그리고 나중에 Knights의 막내였던 츠카사 군이 졸업 후에 그 유닛의 새로운 멤버로 참가하여 네 사람은 다시 함께 활동을 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하게도, 그들의 왕은 자신들의 충실했던 네 명의 기사에게 무기를 제공해줬다. 그렇다고 그가 작곡한 곡들이 전부 그의 기사들에게만 간 것은 아니었다. 학창 시절부터 작곡 방면에서 이름을 알려왔기 때문에 그의 노래를 받고자 하는 아이돌이나 가수는 줄을 설 만큼 많았다. 그런 그는 기분에 따라 자신이 가깝게 생각했던 지인들의 그룹에 노래를 주곤 했다.
"..."
알람도 꺼두고서 느즈막히 일어난 주말 아침, 여전히 눈꺼풀이 무겁게 내려앉은 채로 옆자리를 더듬어보니 역시나 그가 없다. 언젠가부터 느긋하게 일어나 서로 얘기 나누고 장난도 친 후에야 침대를 벗어났던 우리의 주말에서 그가 사라져버렸다. 그는 내가 일어나기 전에 일어나 나갈 준비를 마친 후에 작곡을 위한 인스피레이션을 찾아 집을 나섰다. 내가 비교적 한가한 주말 오후면 함께 했던 일상이었다. 언제부턴가 그는 혼자 집을 나섰고 나는 집에 홀로 남겨졌다. 처음 몇 번은 늘 피곤해 보이는 나를 배려한 그의 행동일까, 하고 생각했었다. 어디서 나온 자신감이었는지 당연히 그럴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지만 이게 몇 번 반복되고 나니 어쩐지 알 것 같았다. 이제 더 이상 그에게 나는 필요치 않다는 걸. 나는 더 이상 그에게 재미도, 자극도 줄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걸.
처음 이것을 깨달았을 때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몰라 그저 혼자서 펑펑 울었다. 눈이 심하게 붓도록 울고 나니 조금 차분하게 생각을 할 수가 있었다. 그가 아직 내게 헤어지자고 말한 것은 아니니까 아직은 괜찮다. 어쩌면 그는 더 이상 그에게 내가 필요치 않다는 걸 무의식적으로 느끼고는 있으나 제대로 깨달은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아직은 되돌릴 수 있을 가능성이 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가 없는 주말에는 밀린 집안일도 하고 장도 보고, 학교의 과제도 했다. 그와 함께 먹을 수 있길 바라며 따뜻한 밥과 막 만들어 맛있는 반찬을 식탁에 차렸지만 그 날은 물론, 그 후로도 몇 주째 그것을 먹는 것은 나 혼자 뿐이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텔레비전으로 아는 사람들이 나오는 방송들을 보며 시간을 죽이다가 씻고 잠자리에 들어 자다 보면 달칵, 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곤 했다. 비몽사몽으로 방 밖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으면 곧 달그락 거리는 소리로 내가 차려뒀던 밥을 그가 먹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가서 인사 하는 편이 좋았을까? 달라진 그의 행동, 변하기 시작한 우리의 관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깨닫지 못한 척, 창문 쪽으로 돌아누워 그가 돌아와 내가 차려놓은 밥을 먹는다는, 그것에 그저 안심하며 혼자 우는 것뿐이었다.
오늘도 저번 주처럼, 저저번 주처럼, 그리고 삼 주 전처럼, 나는 그저 내가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다. 얼마 전에 발매된 잡지들을 보며 최근의 트렌드에 관해서 메모장에 적다가 무심코 벽시계를 쳐다보니 시계는 어느새 오후 다섯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슬슬 장을 보러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오늘도 그가 일찍 들어와 나와 함께 마주보고 앉아서 식사를 하지 않더라도.
하지만 자리에서 일어나는데 휘청, 나는 중심을 잃고 뒤에 있는 소파로 고꾸라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하게 노트에 트렌드 분석을 하고 있었는데도 어쩐지 몸에 힘이 잘 실리지 않았다. 몸을 천천히 움직여 어정쩡하고 불편한 자세에서 벗어나 편히 몸을 가로로 뉘인 채 이마에 손을 대보았다. 기분 탓인지 조금 뜨겁게 느껴졌다. 괜찮다고 생각해왔는데 계속 무리해왔던 것일까? 한쪽으로 돌아눕자 뺨을 타고 귓가 쪽으로 눈물이 흘러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변한 그를 모른 척 하려고 아등바등 하느라 몸이 상한 내 옆엔 어째서 그가 없을까. 문득 깨닫고 보니 서러움이 밀려 올라와 몇 주간 참았던 눈물이 샘솟듯 흘러나왔다. 새삼스럽게 그 사람이 보고 싶다. 몸이 아픈 지금이라도 옆에 있어줬으면 좋겠다.
거실 바닥으로 손을 뻗어 더듬거리다 보니 손에 익숙한 네모 모양이 걸렸다. 그것을 집어 들어 이제는 그 무엇보다 익숙한 번호를 꾹꾹 눌러 전화를 걸었다. 익숙한 멜로디가 핸드폰을 통해 흘러 나왔다. 학창 시절의 Knights의 노래. 그때의 그를 떠올리며 기다려봤지만 몇 분이 지나도 그저 익숙한 노래가 반복해서 흘러나올 뿐이었다. 생각을 바꿔 다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세나 선배? 안녕하세요. 안즈인데요. 혹시 오늘 레오 씨를 만나거나 하셨나요? 연락이 안 돼서요."
"아니. 왕님을 왜 나한테서 찾아? 제일 가까운 사람인 주제에. 와아안전 짜증나거든?"
"네... 그렇죠.... 아무튼 감사합니다. 끊을게요."
그는 자신의 기사였던 네 사람 중에서도 세나 선배를 가장 가깝게 생각하는지 다른 사람들에 비해 자주 만남을 갖곤 했다. 어쩌면 오늘도 선배와 만났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전화를 해봤던 것이지만 아무래도 오늘은 둘이 만나지 않은 모양이다. 수화기 너머로는 들리지 않도록 작게 한숨을 내쉬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평소보다 다급한 목소리로 선배가 불러세웠다.
"안즈."
"네?"
용건이 있어 전화를 건 것은 나였지만 선배도 나에게 용건이 있었던 것일까?
"무슨 일 있는 거 아냐? 목소리 왜 그래? 전문 프로듀서 준비하는 주제에, 아픈 거 아냐 지금?"
이 사람을 쓸데 없는 부분까지 날카롭다. 고등학생 때도 그랬다. 사람이 감추고 싶은 것을 꿰뚫어보고서는 짐짓 떠보듯 물어보거나 경우에 따라선 직구로 던져온다. 내가 레오 씨를 짝사랑 하며 속앓이 할 때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너 왕님 좋아해?' 하고 물었던 것도, 그 이후에 레오 씨와 마음을 확인하기까지 내 푸념이나 고민을 들어줬던 것도 이 얄밉고 눈치 빠른 선배였다.
"아... 그냥 조금요. 잔소리는 나중에 부탁 드려요. 이만 끊을게요."
말투와는 다르게 의외로 상냥한 사람이지만 몸이 무겁고 머리가 지끈 거리는 지금으로서는 그의 잔소리를 얌전히 듣고 있기가 어려워 할 말을 마치고는 답도 듣지 않고 멋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분명 나중에 원래 그가 하려고 했던 잔소리의 배는 듣게 될 테지만 지금은 어쩔 수가 없다. 전화를 끊고선 손에 핸드폰을 쥐고서 방으로 들어가 쓰러지듯 침대에 누웠다. 충분히 잤다고 생각했는데 몸을 뉘이고 나니 눈꺼풀이 점점 무거워지는 것 같았다.
"...즈! 안즈! 정신 좀 차려 봐."
"레ㅇ..........세나 선배...?"
누군가 내 이름을 계속 부르는 소리에 억지로 힘을 주어 힘겹게 떠지지 않는 눈을 떴다. 레오 씨일까 싶었지만 익숙한 목소리임은 분명했으나 바랐던 그의 목소리는 아니었다. 대신, 아까 전에 잠깐 통화를 했던 세나 선배가 눈 앞에 있었다. 잔소리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걸까? 아니, 그보다 여긴 어떻게 들어온 걸까?
"어..................................왜 여기 있어요? 어떻게 들어왔지...? 어..."
"벨을 눌러도 답이 없어서 왕님 생일이며 네 생일이며 이것저것 눌렀어. 그보다 약이랑 죽 사왔으니까 얼른 먹어. 너 프로듀서 준비 중인 주제에 완전 짜증나는 거 알지?"
그렇구나. 이 사람은 나와 레오 씨가 사귀기 시작한 날을 기억하고 있구나. 약과 죽을 사왔다는 사실 조금 놀라우면서도 역시 그렇구나 싶었다. 말은 밉게 해도 늘 주변을 잘 살피는 사람이다.
"고마워요.... 선배."
죽을 먹는 동안 세나 선배는 침대에 걸터앉아서 물끄러미 날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떤 얼굴로 이쪽을 보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고개를 들고 마주 볼 자신이 없었다. 이 사람은 아마도 지금 내가, 우리가 어떤 상황인지 이미 파악을 했을 것이다.
"네가 이렇게 아픈데 왕님은 어딜 가서 전화도 안 받아?"
대답을 하는 대신 입에 죽을 꾸역꾸역 쑤셔 넣었다. 대답하고 싶어도 대답할 수 없다. 나도 모르니까. 애초에 대답을 기대한 것은 아니었는지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수저가 그릇에 부딪히는 소리만 들리다가 죽 그릇의 바닥이 보일 즈음 다시 세나 선배 쪽에서 먼저 입을 뗐다.
"안즈."
"..."
"행복해?"
행복해? 세나 선배는 몇 년 전에도 내게 물었다. 그땐 곧장 웃으며 대답했었다. 네, 행복해요. 하지만, 지금은? 대답을 할 수가 없다. 나는 행복한 걸까? 이게 행복한 게 맞나?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럴 리가.
"행복해?"
같은 질문이 반복해 날아왔다. 이번엔 대답을 들을 생각인 모양이다. 행복해? 아니요. 행복하지 않아요. 대답을 해야 할지,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면서도 행복하지 않다는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그리고 그보다 빨랐던 것은 눈물이었다. 지금 여기서 운다고 무엇 하나 바뀌지 않는다. 다른 사람에게 레오 씨와 나의 끝을 인정하는 것 같아서 울고 싶지 않다. 인정하고 싶지 않다. ...인정하기 싫다.
"........."
"이대로 괜찮겠어?"
괜찮을 리 없다.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간 레오 씨는 우리 관계가 끝났음을 깨닫게 될 거고 그때는 헤어지자고 말할 거다. 붕붕 고개를 흔들었다.
"...왕님이랑 헤어지고 싶지 않은 거지?"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이는 방향으로 눈물방울이 가볍게 튕겨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미 틀렸다는 걸 느끼면서도 아직은 헤어지고 싶지 않다.
"정신 차려, 안즈. 지금 네 상태가 어떤지 네 스스로 안 보여? 너 바보냐? 이대로는 왕님이랑 함께 있을수록 너만 상처 받고 너덜너덜해지는 거, 정말 몰라서 이래?"
그럼 어떡하란 걸까. 내가 어떻게 해야 맞는 걸까. 아니 사실 안다. 이미 내게서는 영감을 떠올리지 못하는 레오 씨와 나의 관계는 내가 이어 붙이려고 한다고 다시 이어 붙여지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제대로 끝을 자각하지도 못한 채 나를 멀리 하는 그의 등을 보며 계속 해서 상처 입을 것이다. 알고 있다.
삐걱, 침대가 눌리는 느낌이 나더니 내 몸이 앞쪽으로 기울었다. 걸쳐 앉아 있던 곳에서 조금 더 가까이 다가와 앉은 세나 선배가 내 어깨를 끌어당겨 안아주었다. 이렇게 따뜻한 사람의 체온은 얼마만이더라.
"안즈. 계속 지금을 유지하는 건 두 사람 모두에게 좋지 않단 거, 너도 알잖아. 왕님은 둘째치고 너 스스로에게 너무 가혹한 일이잖아."
"..........."
"정말 짜증나게 너 왜 이래? 너 이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잖아."
짐을 챙기는 것은 생각보다 오래 걸리지 않았다. 몇 년간 함께 살았던 만큼 내 물건이 적진 않았지만 옷가지나 전공서적, 자료 같은 것들을 제외하고는 전부 버리고 가기로 했다. 챙겨갈 것들을 내가 추리자 세나 선배가 그것들을 정리해서 가방에 넣는 것을 도와줬다. 나는 커다란 쓰레기 봉투를 가지고 여기저기를 다니며 함께 했던 추억을 하나씩 버렸다. 커플로 맞췄던 물컵도, 칫솔도, 나만 쓰는 꽃 향기 나는 바디워시도... 전부 차례로 쓰레기 봉투 안에 집어넣었다.
"안즈. 다 됐어?"
여행 가방의 지퍼를 잠그는 소리와 함께 세나 선배가 물어왔다. 고개를 끄덕이며 집을 쭈욱 훑어봤다. 내가 사용하던 것들이 치워진 집은 어딘가 휑해 보이면서도 원래부터 이랬던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갈까?"
다시 한 번 끄덕끄덕. 이제는 정말로 끝이다. 동화 같이 행복하고 아름다운 결말은 없었다. 현실 어딘가에서 듣고 봤던 것 같은, 뜨겁게 사랑하다가 한쪽의 마음이 유통기한이 다 되어 버려 맞게 되는 그런 흔한, 이별이다. 평범하지 않은 사람과 평범하지 않게 만나서 흔하고 현실적인 연애를 한, 그런 이야기. 그리고 그 이야기는 이제, 여기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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