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의 코르다, 키라 아키히코 × 히노 카호코.
2009.03.25 작성.
초반에 썼던 글들은 기억이 나는데 사실 일부 글들은 기억도 안 난다. 뭘까. 그래서 다시 읽을 때마다 다른 분의 연성을 읽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고교2학년생인 히노 카호코는 요즘 부쩍 자신의 외모에 대한 고민이 많아졌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에게 짝사랑하는 상대가 생겼기 때문이다. 화장대 앞에 앉아서 거울로 이마에 난 여드름을 이리 저리 살피던 카호코는 ‘그’ 사람에 대한 생각에 얼굴을 붉히며 혼자 꺄악꺄악 거렸다. 카호코가 좋아하는 ‘그’는 잘생기고… 잘생기고……… 으음 잘생겼다. 아, 덧붙이자면 조금 많~이 무뚝뚝하다.
키스해주세요
W. 소담(@kimiga_iru)
‘그’에 대해 생각할 때면 카호코의 얼굴엔 절로 미소가 꽃핀다. 수업시간에 선생님들이 하는 말들은 전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학교 성적이 좋지 않으면 그가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쯤은 알고 있지만, 그래도 카호코에게는 그에 대한 생각을 하기에도 24시간이 짧았다.
“히노쨩~ 이사장님이 시키실 일 있다고 부르신데.”
“이사장님도 참 너무하셔-. 왜 자꾸 히노쨩만 시키시지? 오늘도 점심시간 반납이구나…”
친구들의 아쉬움에 찬 말들에 한숨을 한번 쉬어주고 이사장실로 향했다. 다른 아이들은 이사장님을 돕는 것이 어색하고 귀찮겠다며, 자꾸 이사장에게 불려가는 카호코를 동정했다. 카호코는 친구들의 반응에 ‘그러게’ 라고 답하며 힘들거나 귀찮은 척을 한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카호코는 키라 이사장이 자신을 불러주는 것이 좋았다. 같이 있고 싶은 것은 자신이니까.
‘똑똑’
나무로 된 육중한 문을 경쾌하고 가볍게 두어번 노크하면, 어김없이 ‘들어와’ 라고 멋진 목소리가 들려와서 카호코는 저도 모르게 얼굴에 부채질을 하게 되어버린다.
“오늘은 또 무슨 일이세요? 저도 친구들하고 놀고 싶다구요~”
카호코는 괜히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해보지만, 역시 상대인 키라 아키히코는 반응이 없다. 그의 그런 무반응에 괜시리 서운해지기도 하지만, 남은 점심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마냥 좋았다.
“뭐하나? 저기 냉장고에 아이스크림 있으니 먹으면서 이 서류정리 좀 부탁하지.”
키라 아키히코는 무뚝뚝하다. 친근하게 말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카호코를 전혀 여자로 대해주는 것 같지도 않았다. 그러나 점심시간에 그녀를 불러 심부름을 시킬 때면, 점심식사를 막 마쳤을 그녀를 위해 디저트 종류를 준비해놓는 것이 다정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세이소학원의 경영에 관련된 어마어마한 양의 서류들을 내용별로 분류하면서 카호코는 키라를 흘끗 쳐다보았다. 언제부터였을까, 자기보다 나이가 꽤 많은 그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마도 그 날이 키라 이사장이 카호코에게 처음으로 심부름을 시켰을 때였을 것이다. 그는 복도에서 마주친 카호코에게 어느 선생님에게 서류를 가져다줄 것을 시켰었고, 카호코는 투덜대며 그것을 했다. 그런데 그 선생님과 같은 교무실에 있던 다른 선생님이 잘됐다며, 자신이 이사장에게 전해야할 서류를 카호코에게 대신 부탁했었다. 서류를 들고 이사장실로 가보니 그 곳은 조용했다. 처음엔 아무도 없는 줄 알고 돌아가려 했으나, 자세히 보니 소파에 키라가 누워있었다. 잠들어 있는 모습이 너무나 멋있다.
“아, 그러고보니 저번에 데려가주셨던 그 레스토랑 이름이 뭐였죠? 본…본…”
“bon appetit 말인가?”
“아, 맞아요~ 거기 굉장히 맛있었는데 비싼가요? 곧 부모님 결혼기념일이라 좋은 곳으로 모시고 가고 싶거든요.”
키라는 의외라는 표정을 지어보이더니 다시 서류로 눈길을 돌렸다. 조금이라도 더 얘기를 나누고 싶었던 카호코는 아쉬울 뿐이었다.
“글쎄. 자네에게는 좀 무리인 가격인 듯 하네만은.”
“아- 역시 그런가요?”
“그러고 보니 전에 받아둔 무료식사권이 있네만, 싫지 않다면 그것을 줄 수도 있는데.”
카호코는 감사하다고 대답했다. 그녀는 키라가 무료식사권을 준다는 것이 정말로 그것이 필요가 없어서인지, 아니면 그녀를 생각하는 마음에서인지가 헷갈렸다. 내심 자신에 대한 마음에서이길 바랬지만, 현실적으로 볼 때 그에게 그 식사권이 필요 없기 때문이리라.
“그러고 보니 이번주 일요일에 뉴욕 필하모닉의 초청 공연이 있으니, 시간 비우도록-.”
“앗 정말요? 저는 좋아요.”
30살인 키라는 교제 중인 여자가 없어서인지 동행이 필요한 자리에는 곧잘 카호코를 데리고 다녔다. 카호코가 처음으로 그와 함께 다니게 되었을 때, 그는 조금 난처한 상황이었는지 잠시 고민을 하다가 카호코에게 동행할 것을 물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서로 당연하다는 듯이 약속을 잡곤 했다. 다이어리에 키라와의 약속이 늘어갈수록 카호코의 마음은 부풀어 올랐다. 혹시나 키라도 자신과 같은 마음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
“이사장님. 여기…”
“아, 잠깐 실례.”
카호코가 분류하기 애매한 서류에 대해 물어보려는 순간, 그의 품속에 있는 핸드폰이 소리를 내며 두 사람의 시간을 방해했다. 아쉬운 마음에 키라에게 보이지 않게 등을 돌린 채로 얼굴을 찡그리던 카호코에게, 조금 멀찍이 떨어져서 통화를 하던 키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저는 그런 자리가 내키지 않습니다. 아, 만나는 사람이 있는 건 아닙니다만- 저는 선 같은 건-. 지금이라도 상대에게 말씀해주시면 되잖습니까. 일요일은 이미 선약이… 저도 이제 30살인데 어린아이 다루듯이 하시는군요. 후우- 알겠습니다. 이번 주 일요일 H호텔 1층 로비의 카페에서 4시 말씀입니까. 최소한 집안 망신은 시켜드리지 않을테니 걱정마시길. 그럼.”
키라가 전화를 마치고 카호코 쪽으로 돌아보았을 때, 그녀는 벌떡 일어나 있었다. 여러 감정이 섞인 듯 복잡미묘한 표정의 그녀는 입술을 들썩이며, 자신의 머릿속을 괴롭히기 시작한 의문을 입 밖으로 꺼냈다.
“이사장님. 그게 무슨…. 선… 보시는건가요?”
“다른 사람의 통화를 엿듣는 악취미가 있는 줄은 몰랐군.”
“진짠가요? 이번 주 일요일에 선 보시는 건가요?”
“아, 그런고로 이번 주 필하모닉 공연은 함께 가지 못하겠군. 표를 줄 테니 남자친구하고 가는 게 좋겠군.”
키라는 자신이 앉아있던 자리로 돌아와 테이블 위에 놓여있는 종이를 훑어봤다. 카호코는 여전히 선 채로 가만히 있었다. 머리 속이 혼란스러웠다. 그가 자신을 좋아할 것이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그래도 조금 기대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런 그가 자신과의 약속을 취소하고 다른 어떤 여자와 선을 보러 간다고 한다.
“너무해요! 거기에 가지 말고 저랑 공연 보러 가요.”
“자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30살이 되어서까지 만나는 사람이 없어서 부모님이 걱정하시는 것뿐이니 최소한 안심이라도 시켜드리는 것이 아들의 도리겠지.”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말이 가슴에 박혀왔다. 아팠다. 처음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울 때 넘어져서 무릎이 까졌을 때보다도, 실수로 계단에서 굴러서 다리가 부러졌을 때보다도, 노트를 넘기다 손가락을 종이에 베었을 때보다도 더- 더.
“왜…대체 왜 상관없어요! 상관있어요! 아주 많이!”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군.”
카호코는 그 순간 이 남자가 너무 미웠다. 그는 그녀의 마음을 정말 모르는 것일까? 아니면 알면서 모르는 척 하는 것일까.
“여지껏 어디 갈 일이 있으면 늘 제게 말씀하셨잖아요! 공연 티켓이 생겼다고 같이 가자고 하셨잖아요. 레스토랑 식사권이 들어왔으니 함께 가자고 하셨잖아요.”
“그건 그저- 내 심부름을 해주는 대가 같은 것일 뿐. 그리고 아직 16살인 자네가 왈가왈부 할 일이 아닐텐데. 나는 어른이고 자네는 아직 어린 학생이지. 그리고 나는 한 학교의 이사장이고, 자제는 내가 운영하는 학교의 학생일 뿐이지.”
그 다음 순간, 카호코는 이사장실을 뛰쳐나왔다. 그녀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눈물이 주루룩 흘려내렸다. 왜 하필 저 사람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 후회가 됐다. 또래의 남학생을 좋아했다면 이것 보단 마음고생을 하지 않을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이란 것은 카호코 본인이 더 잘 알았다. 처음 그를 좋아하기 시작했을 때도 어쩐지 자신이 이상한 것 같았다. 14살이나 많은 ‘아저씨’를 좋아한다는 것이 부끄러웠다. 그러나 또래의 남학생들에게서 느낄 수 없는 감정이 모락모락 피어나는 것을 막을 수가 없었다.
집으로 돌아온 카호코는 밥도 먹지 않고 바로 방으로 들어갔다. 머릿속은 오직 키라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생각해보니 역시 좋아한 것은 그녀뿐이었다. 어쩌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소매로 눈물을 훔쳤다. 같이 있고 싶은 마음에 동행자 하겠느냐는 그의 별것 아닌 제안을 덥석덥석 받아드려 왔다. 어리석었다.
다음날 학교에 온 카호코에게 그녀의 친구들은 눈이 왜 그 모양이냐고 물었다. 차마 좋아하는 이사장 때문에 울었다고 할 수 없어서, 슬픈 영화를 봤는데 그만 너무 울어버렸다고 거짓말을 했다. 입맛이 없어 점심을 먹다말고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그런데 4반의 어떤 아이가 교실로 들어와 카호코를 찾았다. 그 아이가 간 후에 카호코는 자신의 손에 덩그러니 쥐어진 하얀 봉투를 열어보았다. 거기에 들어있던 것은 뉴욕 필하모닉 공연 티켓이었다. 순간적으로 손에 힘이 들어갔지만 카호코는 그것을 구기지는 않았다. 어제 밤새 울면서 얼마간 간직해온 짝사랑을 접기로 결심했기 때문이다. 티켓을 다시 봉투에 넣은 후 그것을 자신의 주머니에 집어넣고서 카호코는 교실을 나섰다. 내일 모레 함께 공연을 볼 사람을 구하기 위해서.
“츠키모리 군, 공연 보러 가지 않을래? 뉴욕 필하모닉 공연인데-”
“…좋은 공연을 보는 것도 공부에는 도움이 되겠지. 그런데 그 공연 티켓 구하기 힘들텐데.”
“아, 나 받은 티켓이 있어서. 그럼 일요일에 3시쯤 만날까? 그리 멀지도 않고, 4시 공연이니까.”
일요일 아침, 잠에서 깬 카호코는 씻기 위해 화장실에 들어갔다가 푸석해진 얼굴에 놀라버렸다. 그럴 만도 했다. 키라와의 일이 있고부터 그녀는 잘 먹지도, 자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온 카호코는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옅게 화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두 번째인가 세 번째 해보는 화장이라 생각만큼 잘 되진 않았다. 화장하느라 끙끙 대는 통에 결국 히노는 약속에 지각을 하고 말았다.
“히노. 3시까지 보자고 한 건 너잖아. 이렇게 약속시간마다 늦다니-”
“하핫 미안해, 츠키모리 군! 그치만 티켓은 이렇게 잘 챙겨왔는걸!”
히노는 가쁜 숨을 몰아쉬며 티켓 두 장을 팔락여 보였다. 츠키모리는 한숨을 내쉬더니 그녀의 손에서 티켓을 빼갔다. 티켓을 살피던 츠키모리는 ‘응?’ 하는 소리를 냈다. 상체를 숙여 숨을 고르던 카호코는 츠키모리를 쳐다보았다.
“이거 대체 누구한테 받은 거야? 이 티켓 상당히 비싼건데.”
“아 그거… 초청티켓이라고 했어.”
티켓을 쳐다보기 싫었던 카호코는 괜히 땅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티켓은 초청티켓이 아닌 것 같은데. S석이라곤 써 있지만 초청권이라고는….”
츠키모리의 말에 카호코는 그의 손에서 티켓을 낚아챘다. 이러저리 살폈지만 그의 말처럼 ‘초청’이라는 글자는 없었다. 대신에 뒷면 하단 부분에 작은 글씨로 자리들의 가격이 적혀있을 뿐이었다.
“츠키모리 군.”
카호코는 들고 있던 두 장의 티켓을 다시 츠키모리에게 건넸다.
“미안해! 나 급히 볼 일이 생겼어. 다른 사람 불러서 함께 보도록 해!”
그 말을 남기고 카호코는 달렸다. 좀 달리고 있다 보니 자신이 H호텔의 위치를 정확히 알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분명 필하모닉 공연하는 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카호코는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물어물어 H호텔로 향했다.
H호텔에 도착하고보니 3시 57분이었다. 커피 한 잔 값이 어마어마할 것 같은 커피숍에 머뭇거리지 않고 들어가 구석 쪽에 숨듯이 앉았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직 키라는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약속을 잘 지키는 그는 2분 후에 나타날 것이다. 메뉴판을 보는 척 그것을 앞에 펴들고서 숨죽이고 커피숍 문 쪽을 살피는데 정확히 59분에 말쑥한 정장차림의 키라 아키히코가 들어섰다. 그는 커피숍의 중심부를 쓰윽 둘러보더니 창가 쪽으로 다가가 앉았다. 자리에 앉은 그는 왼쪽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그가 웨이터가 가져다 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있자니 모델 같은 몸매의 여자가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지켜보고 있던 카호코는 키라와 선보는 여자의 늘씬한 몸매를 보고는 기겁을 하며 자신의 가슴 쪽을 바라봤다.
카호코는 어떻게 해서든 그 둘의 대화를 듣고 싶었지만 거리가 꽤 있다 보니 그들의 얼굴을 살필 수 있는 것이 전부였다. 지금 이 순간 카호코는 독순술을 할 수 있었다면 좋았겠다고 아쉬워했다. 한 십분 가량 계속 지켜보고 있자니, 저 상대 여자. 아무리 봐도 키라 아키히코에게 한 눈에 뿅 간 눈치다. 뭐라고 말하는지는 몰라도ㅡ 연신 미소를 지으며 습관처럼 머리를 매만지는 것이, 키라에게 호감이 있음이 확실했다. 어쩐지 화가 났다. 키라는 저렇게 키 크고 날씬하고 모델 같은 몸매의 여자가 좋은 걸까? 어째서 평소에 자신에게 잘 보여주지 않던 미소를 보여주는 것인지가 화가 났다.
카호코는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심장이 꽤나 많이 쿵쾅거렸지만, 아무렴 어떻겠는가. 가만히 넋 놓고 있다가 좋아하는 남자를 눈앞에서 매에게 뺏기느니, 한 순간의 용기로 쟁취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는가.
“아키히코 씨…. 어떻게 저를 두고 선을 보실 수 있어요? 저는… 저는 어떻게 하라고…. 책임져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카호코의 입에서 나온, 아침 드라마에나 나올 대사에 그 주변의 공기가 싸늘해졌다. 눈물을 글썽이며 옆을 곁눈질해보니, 키라의 맞선녀는 몹시 당황한 눈치로 키라와 카호코를 번갈아가며 쳐다보고 있었다.
“히노 군? 무슨-”
“아, 저 키라씨, 이게 무슨…”
상대 여자는 말을 버벅 거리며 키라에게 물었다. 그러나 당황해있기는 키라도 마찬가지였다. 카호코는 상대 여자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안녕하세요. 히노 카호코라고 합니다. 이런 식으로 뵙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우리 그이가 부모님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고 나오는 바람에…. 정말로 죄송합니다.”
즉석해서 꾸며낸 말을 울먹거리면서 말하며 카호코는 적절히 울음소리까지 곁들여 줬다. 이쯤 되니 상대 여자 또한 거의 울상이었다. 그녀가 뭐라고 입을 열려는 찰나, 카호코는 키라의 팔을 붙잡고 잡아끌었다. 벙찐 채 있던 키라는 별다른 저항 없이 카호코에게 끌려 나왔고, 상대 여자는 입을 떡 벌린 채 멀어져가는 두 사람의 뒷모습을 쳐다볼 뿐이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히노 군?”
겨우 제정신을 차린 키라가 카호코를 매섭게 노려보며 물었다. 카호코는 키라에게 반쯤 뒤돌아 선 채로 헛기침을 했다.
“지금 묻고 있지 않나. 대체 날 얼마나 창피하게 만들 셈이지?”
“……죄송해요.”
“죄송하다고 될 문제가 아니지. 방금 전에 자네가 늘어놓은 거짓말들이 전부 내 부친과 모친의 귀로 들어갈 텐데, 자,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카호코는 고개를 떨어트린 채로 손가락을 꼼지락 거리며 연신 ‘죄송해요’ 하고 중얼 거렸다. 키라는 제법 화가 나보였다. 아마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책임지라는 둥의 얘기를 해서, 마치 여자를 버린 것 같은 인상을 줘버린 데다가 딱 보기에도 어려보이는 아가씨와 사귄게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이사장님… 죄송해요…. 저기. 저… 정말 죄송해요. 그냥 화가 나고 억울해져 버려서. 저, 이사장님 좋아해요. 그것도 아주, 아주 많이. 이사장님은 분명 어린 무슨- 하는 식으로 생각 하실지도 모르지만, 저는 정말 진지하구요 진심이에요.”
“……”
카호코는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키라에게 자신의 마음을 전했다. 땅을 바라보며 말을 한 탓에 키라의 표정은 볼 수가 없었다. 사실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여전히 화가 나 있을 그가 자신의 고백으로 무슨 생각을 할 지도 무서웠다.
“저기. 이사장님 말씀처럼 제가 이사장님의 일에 참견할 입장은 아니지만요-. 그리고 아무리 제가 이사장님에게는 안 된다고 하더라도요-. 선이라거나, 다른 여자 만나는 건 제가 모르게 해주세요. 앗, 알아요, 이런 걸 부탁한다는 것 자체가 말이 안 된다거나 하는 것 정도는…. 그러니까- 음… 저도 여자에요!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가 다른 여자 만나는 거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순 없는 걸요…. 세이소우 학원 일반과 2학년 2반 히노 카호코이기 이전에, 키라 아키히코와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어서 전전긍긍하는 히노 카호코…라구요.”
호텔 내의 카페에서 있었던 정적에 이어 2차 정적의 막이 올랐다. 건물과 건물 사이의 공간이기는 했지만 몇 발자국 밖으로 사람들이 많이 지나다녔고, 차도 다녔지만 알 수 없는 싸한 공기가 감돌았다. 자신이 한 말의 후폭풍이 두려웠던 카호코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한 번 질끈 감았다가 키라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조금 놀라운 일이 그녀의 눈앞에 벌어지고 있었다. 키라가 마치 힘들게 웃음을 참고 있는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음. 크흠. 히노 군, 자네의 행동 너무 무모하고 막무가내였네. 뭐, 그리 내켰던 자리가 아니었지만 그래도 세이소우 학원의 이사장인 내 체면이 말이 아니게 되었군.”
키라는 거기까지 말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막 3차 정적이 시작되려는 찰나에 키라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자네를 남자로 생각해 본 적은 한 번도 없네만. 오히려 그렇게 느껴왔다면 편했겠지.”
“네?”
“별거 아니네.”
조금 누그러진 것 같은 분위기에, 카호코는 용기 내어 공연 이야기를 꺼냈다. ‘제발’ 하고 마음속으로 외치면서.
“이사장님. 저기- 그 뉴욕 필하모닉 티켓. 초청권이 아니었나요?”
키라는 카호코의 의외의 질문에 아주 잠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고개를 스윽 옆으로 돌렸다. 잘은 보이진 않았지만 뭔가 그의 얼굴이 아주 조금 붉어진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알아버렸다면 어쩔 수 없군. 파타의 선택을 받은 자네는 음악적으로 소질이 있는 것이니 좀 더 많은 걸 보고 느낄 필요가 있고- 그리고- 많이 먹고 한창 성장해야할 시기이니까…”
몇 달 째 짝사랑ing 중인 16살 카호코는 키라 아키히코의 색다른 매력을 알게 되었다. 너무도 잘생기고 멋있는 그에게 ‘귀엽다’ 라는 생각이 들 줄이야.
“이사장님. 저 정말 이사장님이 좋은 것 같아요.”
“그러고 보니 아깐 잘도 이름으로 부르더니 이제 제정신으로 돌아온 모양이군. … 아직 자네에겐 ‘그이’라는 단어는 안어울리더군. 자네의 그 엉망인 화장처럼 말이지. 한 10년은 더 있어야 그 단어가 어울리겠어.”
“너무 길어요- 10년이라니.”
카호코는 속으로 10년이란 세월을 생각해 보았다. 10년 후 자신은 26살 좋은 나이지만, 좋아하는 이사장 키라는 그때는 40살로 이미 결혼을 했을 나이다. ‘안돼’ 라는 말을 돌려서 하는 것인가 하는 생각이 한숨이 나왔다.
“시간은 금방 가지. 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이 도망가는 것도 아니니 그리 서두를 필욘 없다고 생각하네. 화장이라거나 성인 여성같은 말투는.”
히노 카호코, 그녀는 키라를 좋아하기 시작한 이후로 지금 이 순간 최고의 행복을 맛보았다. 달콤한 고백은 아니었다. 사랑한다느니, 좋아한다느니 하는 용기있는 고백도 아니었다. 비록 딱딱하고 어딘지 거만한 말투였지만, 너무나도 ‘키라 아키히코’다운 그 나름의 고백이었기 때문이다.
키라와 함께 서 있는 건물 옆을 자신의 친구인 아모우 나미가 지나가고 있다는 것을 모른 카호코는 기쁜 마음에 활짝 웃으며 키라에게 말했다. 다음날 그 둘의 사진이 나미의 카메라 속에 담겨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한 채.
“키…키라씨. 역시 어색하네요. 으흠. 다시 다시. 키라 이사장님.
키스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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