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즈른 전력 마흔 두 번째 : [졸업]-









봄, 그리고 다시 봄





W. 소담(@kimiga_iru)








"뭐, 일단은 이별이지만. 조금도, 우울해할 필요는 없어. 멋진 미인이 되어줘, 안즈쨩. 그러면 나, 다시 만났을 때야말로 진심으로 구애할테니까. 먼저 가서 기다리고 있을게, 예능계에서 다시 만나자. 그럼 안녕, 안즈쨩. 아하하☆ 그래그래, 그 미소! 그 미소를 나 꽤 진심으로 좋아했어, 다녀오겠습니다~......♬"


 조금 많이 낯간지러운 말을 여느 때처럼 아무렇지 않아 보이게 하는 카오루의 눈은 어쩐지 다른 때보다 조금 더 반짝였다고 안즈는 기억했다. 그렇다면 그때 그의 말을 듣고 있던 자신의 얼굴은 어땠더라? 안즈는 그때를 다시 떠올려봤지만 역시 그다지 알고 싶지 않았다, 그때 자신의 얼굴 표정이라거나는. 떠올리고 싶지도, 인정하고 싶지도 않지만 그때 자기의 양쪽 귀가 라면을 넣기 직전의 끓는 물처럼 뜨거웠다는 것만큼 아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어째서 카오루가 자신과 거리를 좁히고 싶어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가 좁히고 싶어하는 안즈 자신과의 거리는 선후배로서라거나 아이돌과 프로듀서로서가 아니었다. 사실 안즈는 이 문제에 대해 당사자에게 직접 묻기까지 했었다. "어째서, 저랑 거리를 좁히고 싶어 하세요?"라고. 하지만 꽤나 고민 끝에 했던 그 질문에 그는 "네가 정말로 귀여운 여자애니까~,로는 안돼?"라고 대답했다. 안된다. 그의 대답은 그녀에게 전혀 대답이 되지 않았다. 정말로 귀여운 여자아이여서라니. 아무리 안즈 자신이 자기의 얼굴에 후한 점수를 준다고 하더라도 특출난 미인이라곤 할 수 없었다. 그가 여태껏 만나온 많은 여자아이들 중에 자신 정도의 외모의 사람이 전혀 없었을까? 아니면 그는 그때마다 자기에게처럼 거리를 좁히고 싶어 했을까? 여분의 베개를 껴안은 채 안즈는 고개를 붕붕 가로저었다. 그의 말을 깊게 받아들이진 말자고 다시 한 번 다짐해보지만 그럼에도 자꾸 그때의 그 얼굴이 떠오르는 건 분명 그때 그의 눈이 유난히 반짝여서였다고, 안즈는 변명했다.


"두 번째 단추... 이미 다른 여자아이가 받았겠지...?"


 천장을 바라본 채로 무심코 내뱉은 말에 화들짝 놀라 안즈는 몸을 벌떡 일으켰다. 일본의 여자아이, 남자아이들 중에 졸업생의 교복 마이의 두 번째 단추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사람을 없을 것이다.


"미쳤어 미쳤어..."


 안즈는 자신이 다른 누구의 것도 아닌 카오루의 교복 마이의 두 번째 단추를 떠올렸단 사실이 당황스러웠다. 옆구리에 끼고 있던 베개로 잠시간 얼굴을 눌러덮고 있다가 다시 내려 품에 꼬옥 껴안은 안즈는 다음날 카오루를 어떤 얼굴로 봐야할지 알 수 없었다. 여러 가지 문제로 걱정도 많았고 해야 할 일도 많았던 탓에 반례제 날엔 완전히 잊고 있었지만, 이미 약 한 달쯤 전부터 반례제 이후의 언데드와 홍월, 그리고 유성대의 카나타는 스케줄이 잡혀 있었다. 「예능계에서 다시 만나자」 같은 소리를 듣고서 불과 며칠만에 다시 만나야 한다니, 정말 최악이다. 나름대로 오빠처럼 믿고 따르는 선배와 귀여워 하는 후배의 말버릇이 떠오르는 밤이었다.


"정말 짜증나... 완전 죽고 싶어..."






어안이 벙벙하단 말은 분명 이럴 때 쓰는 것이리라. 당연하게도 애슬레틱 에리어 홍보를 위한 촬영현장에서 카오루와 마주쳤다. 그런데 그는 너무 아무렇지 않게 "거절 당할 각오로 고백한 이후로는 처음이지?"라고 말했다. 내가 거절했던가? 아니 그보다 선배가 제대로 고백을 하긴 했던가? 안즈는 눈알을 굴리며 고민했다. 그 때문에 인상을 찌푸려버린 탓인지 카오루는 완전히 오해를 한듯 "재회했을 때 진심으로 구애하겠다고 해놓고, 아직 예능계에 들어가려는 단계이고. 안즈쨩도 역시 곤란하지?"라고 말했다. 역시 반례제 때의 그 말들은 평소의 그가 하는 시시껄렁한 작업 멘트였던 걸까. 안즈는 실망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어째서? 스스로 반문하며 안즈는 왠지 상한 자신의 기분을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 카오루에게 전했다.


"맞아요. 곤란해요."


 안즈의 대답에 카오루는 그가 곤란할 때 종종 짓는 표정으로 웃었다. 반칙이야, 하고 안즈는 생각했다. 왜 가슴 한 켠이 저릿한지 안즈는 알 수 없었다. 그러한 감정이나 느낌이 무엇인지 모를만큼 안즈는 어리지 않았지만 어째서 이런 감정과 기분이 드는 상대가 그인 것인지가 그녀로서는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전학 와서 처음 만났을 때부터 줄곧 그를 피해다니고, 그가 늘 가볍게 하는 차 마시거나 데이트 하자는 권유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해왔던 것은 다름 아닌 그녀 자신이었으니까. 안즈는 때마침 나타나 준 레이에게 감사했다. 갑자기 나타나 말 건 그 덕에 카오루의 시선이 그녀를 떠나 그에게 향했기 때문이다. 틀림없이 엉망일 지금의 얼굴을 그에게 만큼은 보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레이의 상태를 살피며 그와 잡담을 나누던 카오루는 대화가 끝나자 잊지 않고 안즈를 불러, 자기 옆에 앉을 정도론 서로의 거리를 좁혔지 않느냐며 그녀를 자신의 옆에 앉혔다. 카오루가 손짓하는대로 그에게 가까이 다가가면서도 안즈는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그의 진심이고, 또 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의 여자를 좋아하는 그의 가벼운 구애인지 알 수 없어 그가 원망스러웠다.


 나무 그늘에 레이와 쿠로, 그리고 카오루와 앉아 언데드와 홍월의 다른 멤버들이 고군분투 하는 것을 지켜보던 안즈에게 카오루는 종종 말을 걸어왔다.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중요하지 않은 시시껄렁한 이야기뿐이었지만 안즈는 다른 여느 때보다 카오루와 눈을 맞추고 그 얘기를 들으며 때때로 반응해줬다. 전엔 분명 이런 상황이 조금 부담스럽게 느껴졌던 것 같은데 어쩐지 그의 얼굴을 바라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이 시간이 즐겁게 느껴졌다. 카오루가 하는 말을 반쯤은 흘려들으며 안즈는 그의 얼굴을 찬찬히 뜯어봤다. 언데드라는 인기 유닛의 양대 간판답게 잘생긴 얼굴이었다. 여자들에게 인기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는 생각이 새삼 들었다.


'아...... 난 선배가 처음부터...'


 레이의 옆 쪽에서 말을 걸어온 쿠로를 향해 몸을 돌린 카오루의 등을 바라보며 안즈는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그토록 부담스러웠던 이유. 그리고 그 이후로도 그가 쭉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껄끄럽고 부담스러웠던 이유. 깨닫고 보니 여태 풀리지 않았던 의문들이 모두 해결되는 듯 했다. 왜 이런 중요한 걸 이제서야 깨달은 걸까. 뒤늦게 후회해봐야 그는 이미 학교를 졸업한 사람이었다. 학교에서 그와 마주치는 것도, 그로부터 예의 그 가벼운 데이트 권유를 받는 것도 이젠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봄에 전학 와 만나서 다시 봄에 졸업생인 그와 이렇게 멀어지는 것이다. 그가 이전에 말했던 것처럼 이제 안즈는 더 이상 학교의 유일한 프로듀서가 아니게 될테고, 무엇보다 이제 그는 학교의 아이돌이 아니다. 그에게 있어서 학교 유일의 프로듀서이자 여학생이라는 특수성은 이제 안즈에게서 사라지는 것이다. 어쩐지 눈이 시큰 거리기 시작했다. 안즈는 아랫입술을 지그시 누르곤 천천히 숨을 뱉어냈다. 당장의 눈물은 참아냈지만 지금 이 자리에 계속 있다간 정말로 꼴사납게 눈물이 터질 것 같아서 안즈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코가 일행에게 음료를 가져다주러 가겠다고 외치며 자리에서 도망쳤다.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갔다. 프로듀서인 안즈 역시 놀러온 것이 아니었기에 애슬레틱 에리어 체험에 참여한 멤버들의 음료수와 땀을 닦을 수건을 챙기랴 목장에서 스태프들을 도와 동물들을 데리고 나오랴 정신이 없었다. 모든 촬영이 끝나고 촬영에 참여했던 멤버들이 각자 집으로 가기 위해 역 앞에 모였을 땐 이미 하늘이 단풍잎처럼 붉게 물들고 있을 때였다. 이제 정말 끝이구나. 안즈는 흘긋 카오루를 쳐다봤다. 이런 그녀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카오루는 다른 사람들과 잡담을 나누는 레이에게 졸업 후의 활동과 관련해 상담하고 싶다며 이만 해산하자고 했다.


'멍청이... 선배 바보!'


 따로이 인사없이 레이와 무언가를 얘기하며 가는 카오루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정말로 반례제 때 그가 했던 말들은 역시나 평소의 가벼운 구애 같은 것이었단 게 실감이 났다. 집이었다면 침대에 뛰어들어 엉엉 울기라도 할 테지만, 아는 사람들과 함께 밖에 있는 지금은 그럴수도 없었다. 조금씩 조금씩, 카오루가 멀어져갔다. 깨닫자마자 이대로 끝이구나. 안즈는 그 뒷모습을 보며 중얼거렸다. 여태 거절 당하면서도 끊임없이 데이트를 가지 않겠냐, 차를 마시러 가지 않겠냐 권유하던 카오루의 모습들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렇게 계속 거절 당하면서도 계속 웃으며 권유할 수 있었던 걸까? 안즈 자신은 다음에 또 보자는 말조차 입에서 꺼내기가 힘들었는데.


'그렇구나. 농담이었더라도 이런 건, 엄청 용기가 필요한 거구나.'


 진지하지 않은 권유더라도 늘 거절하는 상대에게 매번 같은 권유를 하는 데엔 많은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란 걸 여태 생각하지 못했다. 늘 웃는 얼굴로 장난처럼 말해오던 그도 사실은 꽤나 많은 용기를 내고 있었을 것이란 걸, 정말 너무도 늦게 깨달아버렸다. 용기. 용기가 필요했다. 어쩌면 늘 먼저 한 발자국 다가와줬던 그에게 이번에야 말로 안즈가 먼저 한 발을 내딛을 차례인지도 모른다.


"미안! 나 잠깐 갔다올게!"


 마음이 급해 어디를 다녀오겠다는 건지도 말하지 않은 채 안즈는 카오루와 레이가 간 방향으로 내달렸다. 아직 멀리 가지 않았어야 할텐데. 안즈의 마음이 급했다. 이쪽 저쪽 살피며 뛰기를 몇 분. 안즈는 마침내 낯익은 청자켓을 발견했다. 다리가 긴 두 사람이었기에, 만약 그들이 대화를 나누며 걷지 않았다면 아마도 안즈는 그들을 따라잡지 못했을 것이다. 청자켓에 가까워질수록 안즈의 심장이 쿵쾅쿵쾅 심하게 뛰었다. 이 엄청난 심장박동이 그녀가 달렸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을 지금의 안즈는 잘 알 수 있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달리면 된다. 아주 조금만.


"카오루 선배!"


 그에게까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안즈는 저도 모르게 카오루의 이름을 불렀다. 꽤 많은 인파 속이었지만 그들과의 거리가 멀지 않아서인지 카오루는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발걸음을 멈춰 주변을 두리번 거렸다.


"선배!"


 마침내 그의 바로 뒤까지 온 안즈는 그의 옷소매를 붙잡았다. 예상치 못한 신체접촉에 카오루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돌아봤다. 이미 주사위는 던져졌다. 이렇게나 뛰어와서 붙잡아놓고선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말할 수 있을리도 없고, 그걸 듣고 "그래? 그렇구나!" 하고 넘어갈 사람도 없을 테니까.


"안즈쨩?"


 급하게 뛰어와 자신을 붙잡은 안즈가 숨을 몰아쉬며 가만히 있자 걱정되는지 카오루가 몸을 굽혀 안즈와 시선을 맞췄다. 회색빛이 도는 옅은 갈색의 눈이 걱정스레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봤다. 이젠 정말로 거부 당할 것을 각오하고 말을 꺼낼 때였다. 안즈는 쥐고 있던 카오루의 옷소매를 조금 더 세게 잡았다.


"머,멋진 미인이 되면 그땐, 그땐 정말로......"

"......구애할게. 사실 어느 때부터인가는 항상 진심이었지만. 그땐 정말 그 어느때보다 더 진심으로, 구애할게."


 처음엔 안즈가 갑자기 무슨 소릴 하는지 알아듣지 못한 채 그저 눈을 깜빡이며 안즈를 쳐다보고 있던 카오루는 이내 그녀가 하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곤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두 사람에게서 완전히 존재가 잊혀져버린 레이는 봄바람과 함께 찾아온 재미난 구경을 드라마나 영화를 보는 시청자 마냥 흐뭇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3학년 유일의 프로듀서와 연예계에서 활발히 활동하기 시작한 졸업생이 사귀고 있단 소문이 교내의 아이돌들과 프로듀서들에게 퍼진 것은, 벚꽃이 막 지기 시작했을 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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