옅은 회색의 침구 위, 아무렇게나 몸을 웅크리고 있던 후타미는 무거운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올렸다. 한낮의 태양은 방에 걸려있는 커튼 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의 얼굴을 밝게 비추고 있었다. 제법 큰 키만큼 큼직한 손바닥으로 눈가를 가리며 그는 암막 커튼을 살 걸 그랬다며 속으로 남들 앞에선 절대 하지 않을 욕설을 내뱉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있자니 점점 정신이 또렷해졌다. 다른 사람들이라면 이미 점심을 챙겼을 시간이 훌쩍 지난 시간에야 마침내 후타미는 무거운 몸을 일으켰다. 휘적휘적, 겨우 침대를 벗어난 몸은 곧장 부엌으로 가 혼자 사는 집답게 그리 크지 않은 냉장고로 향했다. 규칙적인 것과는 거리가 먼 생활을 하는 그의 냉장고답게 안에는 제대로 된 음식은 거의 없었다. 냉장고 속을 위아래로 두어 차례 훑어본 후에 길게 한숨을 내쉰 그는 손을 뻗어 이전에 미리 씻어두었던 사과 하나와 맥주 한 캔을 집어 들었다
폭신한 소파에 몸을 깊게 파묻은 후타미는 사과를 입에 베어 물고는 익숙한 손동작으로 옆의 원형 탁자 위에 올려둔 맥주 캔을 땄다. '딸깍'하는 소리가 이미 맥주로 입안을 적신 것처럼 시원하게 느껴졌다. 목구멍을 톡톡 건드리는 청량감을 주는 맥주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5년 남짓한 시간 동안 후타미가 익숙해진 것 중 하나였다. 더운 날씨 탓에 캔의 표면은 이미 물방울이 방울져 있어 캔 뚜껑을 딴 것만으로도 그의 손은 축축해져 있었다. 어차피 다시 축축해질 손을 굳이 추리닝 바지에 문지른 그는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를 배경음 삼아 목을 뒤로 젖히고서 눈을 감았다.
「후타미 군」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았다. 이 목소리가 맞던가, 후타미는 가만히 눈을 뜨고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목소리를 마지막으로 들었던 것이 4년 전의 겨울. 이제 그녀의 목소리가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유즈키..."
생각만 해도 얼굴에 미소가 번지게 해주던 이름은 이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을 아리게 하는 이름이 되어버렸다. 괜히 시큰거려오는 눈가를 날씨와는 어울리지 않게 길게 늘어진 소매로 북북 닦은 후타미는 심만 남은 사과를 탁자 위에 올려두고 처음보다 미지근해진 맥주 캔을 집어 들었다.
"연락 한 번 없기야......?"
4년 묵은 서운함을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입 안이 썼다. 백날 이렇게 혼자 떠들어봐야 소용 없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녀는 그와 친구들이 알고 있던 집에서 이사를 가버렸고 핸드폰 번호와 메일 주소마저 모두 바꿔버렸다. 스스로 자취를 감춰버린 그녀를 찾을 방도를 그로서는 알지 못했다.
맥주 한 캔을 마시긴 했지만 여전히 정신은 또렷했다. 후타미는 소파 반대편에 구겨진 채 틈에 끼어있는 후드집업을 잡아 빼 입고는 멘션 밖으로 나갔다. 그는 좀 아까까지도 침대에서 누워있던 탓에 평소보다 더 부스스한 머리에 후드 모자를 뒤집어 쓰고는 멘션 뒤편의 벤치에 앉았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갑에서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아.... 이런...."
반대편 주머니까지도 뒤져봤지만 후드 집업의 주머니 속에 있을 터인 라이터가 보이지 않았다. 소파에 던져두었을 때 주머니 속에서 굴러 떨어져버린 것이리라. 한숨을 크게 내쉰 후타미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몸을 웅크렸다. 되는 것이 없는 하루의 시작이었다.
' ♪♬♪♬♪♬'
주머니에서 들려오는 착신음에 후타미는 소리가 나는 곳을 뒤적였다. 핸드폰의 윗면에 작게 나있는 액정에는 둘도 없는 그의 친구 이름이 적혀있었다. 눈꼬리가 처져서 서글서글한 인상을 가졌음에도 그에게는 가까운 친구가 얼마 없었다. 원인은 그에게 있었다. 쉽게 친해질 수 있을 것 같은 인상과는 달리, 그는 상대가 일정 거리 이상 다가오지 못하도록 벽을 치곤 했다. 물론 그가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집안 사정으로 학교를 조퇴한 한 친구를 함께 놀던 다른 친구들이 욕하는 것을 들었던 것이 그가 다른 사람에게 벽을 치는 계기가 됐었다. 울려대는 핸드폰에 적혀진 이름의 주인은 그런 그의 벽을 넘어 벽 안쪽에 자리한 사람 중 하나였다. 물론 벽의 높이를 낮춘 것은 후타미 그 자신이었다. 눈이 마주치면 이유 없이 시비라도 걸게 생긴 그 친구는 생긴 것과는 다르게 제법 착하고 정의로웠다. 자신을 무서워하는 다른 학생들에게 자신에 대한 오해를 해명해서 본인이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어필하는 것조차 포기한 채, 그저 모두가 무서워하는 존재로 남아 저 자신이 다른 사람들을 피하는 모습은 후타미에겐 굉장히 흥미로웠다. 그래서 먼저 안면몰수 하고 다가갔고, 그렇게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훌쩍 사라져버린 유즈키가 떠올랐었기 때문에 별로 전화를 받고 싶지 않았다. 그녀를 떠올린 날이면 가라앉는 기분을 애써 포장하는 게 어려웠다. 후타미는 친구들에게 이제껏 자신이 아무렇지 않은 척 했던 연기들이 제대로 먹혀 들어가긴 했던 것인지 사실 알 수가 없었다. 같은 문제로 마음 속에 상처를 입은 것은 그 혼자만은 아니었기 때문에 분명 그들은 자신이 괜찮지 않다는 것을 눈치채더라도 내색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갑작스러웠던 친구, 아사히나 유즈키의 잠적에 세 사람이 모두 패닉 상태에 빠져있었던 적도 있었지만 다른 둘은 지금은 멀쩡히 그들의 생활을 하고 있다. 후타미는 저 자신이 유즈키의 잠적을 핑계로 그저 글러먹은 인생을 살고 있을 뿐인 것은 아닌지 헷갈리기도 했다.
"하아..."
길게 한숨을 내쉬고는 물고 있던 담배를 주머니에 구겨 넣고는 끊겼다가 다시 시끄럽게 울려대는 핸드폰을 열어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오우, 잇세이다. 지금 집이냐?"
토도로키 잇세이. 그는 성격대로 다른 인사 없이 본론부터 얘기했다. 슬리퍼 끝으로 바닥의 흙을 비벼 파며 후타미는 그렇다고 답했다. 옆에서 다른 친구인 산젠인 타카미치의 목소리도 들렸다. 아직 해가 강한 이 여름 날의 낮 시간부터 귀찮게 왜 만나려 하는 것인가 싶었다. 오늘은 그들만큼은 별로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집이냐고 묻는 것으로 보아 그 둘은 이미 이쪽으로 오고 있는 중일 것이다.
"그런데 갑자기 무슨 일~? 오늘은 귀찮은데~"
"그건 가서 얘기한다. 도망치지 말고 집에서 기다려. 먹을 거 사갈 테니까."
"예이~"
전화를 끊은 후 핸드폰 액정을 내려다보며 후타미는 생각에 잠겼다. 7년을 알아온 사이기에 알 수 있었다. 그의 친구인 잇세이는 드물게 들떠 있었다. 옆에서 들려오는 타카미치의 목소리 또한 신난 듯 했다. 무엇이 그들을 들뜨게 만들었는지는 조금 흥미가 돌았다. 후타미는 그들이 도착하기 전에 바닥과 침대 위 여기저기 널려있는 옷가지들을 치워야겠다고 생각하며 일어났다.
곧 집에 들이닥칠 친구들의 의해 자신이 현재의 그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을 하게 될 것이란 것을, 그리고 그 끝에 오래도록 찾고 기다렸던 아사히나 유즈키를 다시 만날 수 있게 되리라는 것을, 그때의, 탁자 위에 놓여있는 다 먹은 사과와 빈 맥주 캔을 치우고 있던 후타미로서는 절대 상상할 수 없었다.